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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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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0. 15:57 카테고리 없음

(텍스트로 정리, 2013 한국실험예술제 중 서울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된 대부분의 퍼포먼스들에 대한 리뷰/비평입니다.=원고지 70매 좀 안 되는 분량) 사진은 추후 함께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임택준


심장 박동에 상응하는 메트로놈의 박자를 따라 내면의 상징물인 의자로부터 공간을 둘러싼 설치의 행위, 그 둘의 불균형적 공존과 함께 그 행위의 리듬을 수여하며 균열을 낳던 사운드가 숨의 옥죔으로 현시되는 결말, 곧 분리적 사운드의 이질감이 신체를 현상하고 있었고 어떤 파국까지 예고하고 있었다는 것, 이것은 그래서 설치를 퍼포먼스로 전이하는 과정이었다는 표면 아래 간과될 수 있는 것은 사운드의 절대적인 효과이다.


곧 우리의 숨과 일치되는 어떤 체현적 환경의 구현과 그 극적 결말의 고양이라는 점에서 설치는 설치의 완성을 위한 예비적 순간인 동시에 잉여적 순간이었으며 실제로는 메트로놈처럼 단조롭고 위태하며 벗어날 수 없는 옥죔을 ‘너’의 신체와 ‘나’의 신체의 겹침과 균열에 사로잡히거나 사로잡히지 않는 그런 이 환경 안에 있음으로부터 파생하는 두 신체적 반응의 비동시적 동시성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박이창식


밀가루 반죽을 오물거리며 씹고 뱉은 뒤 그 총합을 벽에 던지기, 그리고 그 찰나적 충격의 순간/진동과 어김없는 떨어짐의 유예된 순간, 그 스쳐지나가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끝, 형태적 변화 없음과 화학적 변화의 차이를 물리적 행위로 바꾸는 것, 일종의 씹음의 섭취 행위를 바로 무용한 배설의 행위인 공간 안의 투척으로 일종의 ‘배설-섬島’을 만들고 그것들을 다시 수거한 뒤 원래의 형태로 합치고 던지기, 곧 일종의 분리와 합체 행위, 아니 비분리적 (공간 안에) 나눔과 숙명적인 합의 궤적인 셈, 곧 모든 것은 이 한 순간을 위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 ‘결말’은 일종의 충격이고 일종의 편의적인 나눔이라는 논리적 해석으로 소급하는 것은 오히려 어떤 카니발리즘적 의식 행위, 냉소와 거만/여유로움이 묻어 나는 얼굴이 걸림돌로 튀어 오르며 마치 그의 이입할 수 없는 얼굴의 반대편에서 이 (일종의 비체卑體들로서) 개체들의 생존과 ‘숙명’의 힘이라는 뜻밖의 공상적 서사를 빚어내게 된다.

 

홍오봉


일종의 지신밟기의 전통적 의식을 상기시키는, 많은 이들의 참여로 형성된 팽팽한 천-대지 위를 한 명이 올라타 지나가는 행위로의 귀결, 거기에 사람들 틈을 삐져나오며 도착하는 분홍 긴 풍선들의 새의 궤적 같은 움직임, 빨간 물결의 대한민국의 집단적 열광에 상응하는 일종의 ‘놀이’ 형태는 우리의 익숙한/잊힌 문화적 디엔에이의 감응을 거쳐 되돌아오며 작가 고유의 과잉의 활력 에너지로 거듭나고 전해지는 한편, 사람이 올라타 가라앉는 그러나 결코 찢기거나 하지 않는 대지의 굳건함과 그 무게가 지정하는 건강함으로 그 경험을 소급시킨다.

 

이유희란


“안녕들하십니까?”/“Are you (guys) doing good?”의 교차적 무한 반복, 그 와중에 자기로 소급되는 분무기에 축적해 자신의 얼굴을 가격하는 정화/폭력 행위, 곧 외부로 향해야 할 악에 대한 투쟁적 격발이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진단적 이성으로 한데 그러모아지며 “안녕하십니까”가 갖는 일련의 사태, 곧 그 인사의 방향이 결국 자기 자신임을, 그리고 정확히 그 내재적인 분노/무기력이 바깥으로 확장되며,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끝없는 외부로 향하며 무한 파급되는 광경으로서의 사태를 재현하며 일종의 (이 퍼포먼스 안에서의) 가상의 일원이 되는 것, 여기서 관객은 정확히 “안녕하십니까?”에 대한 답변으로서 “예./아니오!”가 아닌 “안녕하십니까?”로 서로에게/자신에게 안부를 건넸어야 했다. 


이 점에서 이 퍼포먼스는 곧 한 명의 분노와 그것을 안는 (결코 관객에게 분출하지 않았던) 이성의 슬픔을 보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유효하지 않음을 비극적으로 지켜보는 단 한 명의 관객이 되는 것이다(곧 ‘실패는 실패를 낳는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절박한 무엇이었지만(그 표면상에서가 아니라) 한편으로 퍼포먼스의 정치성이 재현이나 그것에 한 발을 걸친다고 (예술이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너무 매력적이었는데 밥솥을 진 ‘아낙’과 수영복을 입은 ‘모델’의 부조화적 조응은 전자의 민족을 국민으로 대응시키고 후자의 쇼를 퍼포먼스의 자극으로 대응시키는 것 가운데 드러났다.

 

신진식


444초 동안 한 겹씩 옷을 벗기를 실행하는 세 명의 ‘여성’, 이 동일하지 않은 동일자의 형상은 가령 퍼포머가 아닌 여성이라는 성으로 환원된다. ‘인류의 반’은 거기에 아마 해당하고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 곧 무개성적 개성을 지닌 퍼포머들은 ‘수줍음’을 어떤 건조한 마주칠 수 없는 얼굴 속에 현상시키고 있었는데, 이는 동시에 그것을 들여다보기의 관음증적 욕망으로 전도시키는 바였고, 우리 역시 그 얼굴의 반대편에서 그 얼굴처럼 그 은밀한 그러나 분명한 욕망을 은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거의 옷을 벗는다기보다 옷을 훔쳐내며 동시에 신체를 타자(관객)의 그것으로 훔쳐내며 가학적 시선의 행위와 피학적/수동적으로 머무는 신체 움직임의 대응 쌍이 그 안에 있었다. 결국 속옷들을 벗겨 내지만 누드는 없다. 그 전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상하고 기대하기 자체에서 이미 초과 달성된 욕망의 누수가 선연하게 그 흔적들의 탑이 쌓아지고 있었다. 444초의 제한 아래.


Michael Steger


금빛 페인트로 칠한 의자를 갖고 등장해, 누드에 붉은 계열 긴 가발을 쓰고 그 의자를 밟아 부수고 쇼핑을 하러 가는 몬스터, 누드가 낯섦과 낯설지 않음으로 드러남에서 가발-머리를 흔들며 일종의 남자도 여자도 아닌 혼종적 경계의 괴물로 거듭나는 착시적 풍광으로, 그 찰나적 순간에 각인된 타자의 형상이 틈을 벌린다. 쇼핑에 중독된 현대인이라는 끝없는 소비로 감추는 자기 소외의 현상이라는 진부한 재현 뒤에 어떤 인간 그 자체의 연약함과 지극히도 개인적인 정서의 체현이라는 부분에서 갖는 균열, 곧 그 균열에서만 이 작품의 지극한 슬픔의 양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선 그 결정적 순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 어떤 해소할 수 없는 내면, 채울 수 없는 현장과의 괴리를 그 지나친 온 몸의 흔듦으로 해소하고 채우려는 움직임이며, 그 알 수 없는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슬픔의 작품 외적으로만 지적하고 또 드러나야 할 그 부분은 곧 이 작품과 현실과의 경계를 묻는 한편 그 작품이 현실로 추락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곧 봉인하고 해제해야 할 부분은 미리 해제됐고 애매하게 재봉인되며 사라진다. 


한큐


일초에 한 명, 무대에 늘어나는 관객은 퍼포머-주체를 숫자-세기를 통해 불러내며 그의 부재를 대리하며 그를 육화하는 수많은 신체가 된다. 이는 사실상 대리전(代理戰)이었고 주체가 없는 가운데 퍼포먼스가 일어날 수 있는가의 실험이었다. 그 사실(‘선험적 퍼포머의 현존의 부재’)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몫 없는 자리에 대한 기대와 호응은 그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에서 그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바뀌어 가는 가운데서도 계속되는데, 애초에 이는 숫자 세기를 처음 인도한 이에게로 수렴된다. 


숫자는 인원을 넘어서며 포화된 무대는 이 반복된 의례적인 숫자 세기가 그 주체의 나타남과는 상관없이 끝을 향하고 있고 그 끝을 단축시키기 위해 한편으로는 이 숫자 세기의 프로그램을 인지하고 있고 또 그 기인하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 ‘끝으로 가는 퍼포먼스’로서-숫자 세기를 빠르게 한다. 성능경 작가가 그것을 위임받은 자였는데 위임의 사전 단계, 그리고 보증의 구현 과정, 집단행동의 의식 만들기로 그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것이 다다. 말이 (이미) 있었고 말이 (뒤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 퍼포머와 관객이 절합되는 형식으로 주체 역시 분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Frederic Krauke


비늘을 덮은 인간-물고기, 요는 인간의 물고기 되기라는 신화적·토템적 의식으로 그 불가능성의 이상은 불쾌함과도 닿아 있다. 생선에 입을 맞추다. 냉동된 생선을 깨물어 겨우 부분을 떼어내고 신체를 훼손하며 그 고통에 부르르 떠는 것은 자연스런 문명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비껴나며, 스스로를 지우고자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실패함으로 인한 불가능성의 현존이 불가능성의 결합에 대한 이상을 오히려 초과하며 고행의 측면은 그럼에도 자연에 있음의 추위와 자연에 육화되는 신체를 현시하게 된다. 신체 훼손은 예술적인 진정성의 측면과 안타까움 대신 자연이라는 대타자를 인식하는 상상적·감각적 차원으로 건너뛰게끔 한다.

 

성능경


444초를 세고 그 바깥에서 퍼포먼스가 일어난다. 일상적인 행위의 채집과 재현/구현의 자기 충족적/자가 완성적인 과정으로 이뤄진다. 여기에 숫자는 리듬이며 리듬의 기표로 그것들을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절한다. 그 444초가 끝나기 전에 퍼포먼스를 끝내지 않는, 마지막 1초를 끊임없이 나눠 444초를 유예함은 완벽한 끝(으로의 합치)은 불가능하며 그 시간을 무한정 늘리며 이것을 하나의 유희적 놀이의 규칙으로 전유한다는 것이다.

요는 이 444초의 규칙을 비틀며 또 그것을 이용해 기존의 자신의 퍼포먼스 형식을 재언표화하고 어떤 긴장과 그것의 지속으로 재위치시킨다는 것이다.

 

Tizo All


총을 관객에게 겨누되 발사하지 않으며 풍선을 향하되 그것이 격발되거나 되지 않는다는 것, 요는 후자에 있다. 전자는 나를 향한다는 점에서 실제적이나 실제 그것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상상적이고 재현의 범주에 속한다. 후자는 이 장치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하는 것인 듯 보이지만, 격발되지 않음은 격발됨의 충격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예측을 비껴나며 격발되기 이전의 순간을 연장한다. 그가 누드로 이것을 한다는 것은 벌거벗음과 성기에 대한 시선의 욕구는 있는 반면 실은 그 총이 남자의 성기의 상징물 정도를 대입하는 것 역시 이 작품의 결과적이고 인위적인 메시지의 측면과는 별로 상관없음을 알게 된다면 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순수한 격발’로서 자신을 하나의 매체 형식으로 제시하는 데서만 의미가 있다.

 

이정훈


“Change the world”와 “Change the president”의 두 문장을 메탈 조(調)로 교차 반복하며 무스를 자신의 눈과 입에 끊임없이 쏟아 붓는 것(이는 외부의 부조리한 압력을 은유한다). 두 문장에서 ‘world’는 ‘president’와 대구를 이루는데 곧 둘은 교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전자는 후자의 예비로서 존재하며 세계는 곧 대통령과 등가되는 것이자, 실제 바꾸어야 할 우선하는 것은 대통령임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냐는 물음을 작품이 사유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며 현재 일 년/일련의 사태를 적시하며 그것에서 기인하는 분노의 현상학은 그 무스가 보증하는 진정성의 측면과 함께 그 단어의 파급력은 오히려 개인의 이상과 감정으로 수렴되며 이는 관객들이 웃을 때 웃지 말라고 소리 친 그의 말이 유머로 다시 소환될 때 이 퍼포먼스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또한 가리키고 있다. 곧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대통령부터 바꿔야 하며 그것 외에는 사유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이 퍼포먼스는 결국 분노의 진정성 따위의 일회적 해프닝의 측면 밖에는 의미를 가져가지 못하게 된다. 반면 “Change the world”의 운율과 공명은 유희적으로 입에 남게 된다.

 

유지환


444명의 복제된 얼굴을 뿌리기,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약간 뿌린 물에 띄우기, 곧 시뮬라르크로서 ‘착시적 얼굴’은 후자의 과정으로 인해 현존의 은유로 바뀌며 그것을 공간으로 (배치하고) 다시 쓰레기로 (거두어) 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노동과 제의의 행위로 얼굴은 나의 신체적 현존을 보증하게 된다. 곧 시뮬라르크는 부재하며 오히려 행위/실제만이 자리하는 것이다.

 

Peter Rosvik


“What is next(다음은 무엇인가)?”는 444초(=죽음)에 뒤이은 또 다른 시작(재생), 그리고 수많은 라인업에 대한 기대적 소비에 대한 표면상의 이름에 다름 아니다. 다음은 올 것인가라기보다 다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고 이제 ‘소비’할 차례만이 남았다는 것, 지금에 대한 이야기, 지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간격이 현재에 삽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 곧 444초의 형식 위에 더해진, 그것을 소비적 문구로 완성하는 이 표제어는 물음이 아니라 하나의 슬로건이 된다.

 

신체에 굵은 호치키스를 박고 마지막으로 “What is next”를 완성하는 것, 벽은 곧 신체요, 신체는 벽의 물화에 다름 아니다. 배를 가격함은 그 아픔을 현장의 열기와 그것을 안고 ‘시간을 다스리는 주체’로서 감내해야 하는 한편, 그 가격됨에 대한 떨림은 완전히 상쇄할 수 없는 무엇으로 남는다. 신체를 훼손하고 막 다루는 것은 록의 체현이자 현시이며 결과적으로 장르의 재현이면서 그 장르의 연원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표구/대문을 완성함은 이것이 ‘시간’ 후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화되어 있음으로 남았다는 데서 가능해졌다.

 

Emily Kuhnke


발을 들어 자연을 환유하는 몸짓들, 그리고 누드, ‘신화적 표적’으로서 누드화 내지 마네킹-여신이 되는 것, 거기에 ‘이것이 마지막 주문이다’라는 기치 아래 저마다의 메시지를 붙이는 것, 일종의 관객의 조심스럽고도 열띤 참여의 의식(儀式)을 넘어서서 어떤 황홀함의 지경에 있는데, 이러한 초과된 정서는 관객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용인의 발화인 셈이며 한편으로 합치되지 않는 미끄러짐이기도 하다. 곧 그는 궁극의 낯섦 자체로 현상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저버리며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드의 충격은 그녀의 자연의 환유물로서의 의도와 얼굴로 인한 기이한 신체의 표현의 동시적 구현에서의 시차를 통해 유예되고 있다. 


Myk Henry


동아줄로 흑백으로 정확히 수직으로 나뉜 몸을 뱅글뱅글 감싼 채 긍정적인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부정적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각각 흰색과 검은색의 종이에 적어 그 줄-신체 위에 붙이는 참여, 그리고 불을 붙여 그의 신체를 불태우는 것으로 그 기억들을 대리 소각한다. 부정과 긍정에 대응하는 흑백은 하나로 뒤섞이고 진정 지나간 것으로 물질화하는 동시에 비물질화하는 공동의 공통 되기의 정화 작용은 예술가로 수렴되는 숭고함의 진정성과 모두의 조금은 깨끗해진 의식의 결과로 이어진다. 


실상 그 뜨거움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했던 아티스트로 인해 이는 온전한 신체의 고통과 극복의 동시적 작용으로 인한 숭고함을 생산하지 못하는 실패를 낳고 문자로 발화했던 관객들의 행위 역시 실패의 해프닝이 된다. 미묘하게 고통의 무릅씀은 이길 수 있는 고통으로 환원되어야지만 된다는 하나의 규칙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기에 당연한 것이다. 곧 비과학적·예측 실패적 오류를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Amy J. Klement


(일종의 하나의 눈으로서 신체인 커다란 깔때기로 덮은 얼굴 이어) 깔때기를 위로 쓰고 국기들이 쌓이는 매트릭스 윈도우로 변화하게 된다. 자신을 매체 판/매개 장치로 변형시키고 굴곡진 판으로 그 인격을 무화시키는 방식, 국기들을 자의적인 순서와 교환 가능한 형식으로 떨어뜨린다. 곧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의 대등한, 상징 이전의 기호의 방식으로 치환하며 놀이의 형식으로 재전유하는 것, 그리고 무화된 신체로 자신을 기표로 내세우는 것, 결과적으로 어떤 흰색 표면에 또 다른 투명함으로 과잉되는 얼굴만이 남는다. 이 얼굴은 수많은 국기들의 색, 실상 빛이 지나갔음에도 잠자코 있는, 낯섦을 낯섦으로 드러내는 눈동자이다. 곧 그 눈동자만이 남는다. 매체에 대항해 매체의 일부가 되는 매체적-비매체적 신체의 비동시적 동시적 현상


조은성


얼굴에 물을 붓으로 칠하기, 곧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비물질적 공명으로서의 물질적 효과, 주어진 것을 그 자체로 드러내기, 감촉의 감각과 비시각적 (비)생산의 시차 속에 작가는 계속 그림-행위를 하고 비-그림으로써 어떤 효과들만을 생산한다. 두 가지 다른 효과 속에서 시각은 실패하고 촉각과 어떤 착시적 시각 효과만이 남는다. 그 자체를 드러내는 생산하지 않는 생산은 그림에 대한 메타 차원의 접근이라기보다 안정적인 접촉의 매체 형식을 선택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문재선


공간과 결부되어 공간으로부터 새로이 신체로부터의 중심을 만들기, 공간을 신체로 옮기고 신체를 공간에 부착하기는 머리에 낀 얇은 줄로부터 가능해진다. 신체의 공간화는 공간의 중심을 만들기이며 여기서 신체는 자신의 무게와 반작용을 하는 낙하 이전의 신체, 그리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서의 이후의 신체이다. 실패하는 신체는 의도치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긴장의 시간은 신체가 공간으로 공간이 신체로 축소되는 동적 건축의 일부를 낳고 있었다.

 

방효성


와인/음료/귤을 먹고 그것을 씹어 뱉은 후 하나로 섞어 그것을 마시기라는 공동체적 카니발 의식, ‘비위’로 측정되는 현상은 다른 침들을 다른 하나의 동일한 물질로 환원시키는 사유적 의식 아래 유희로 변환된다. 먹음에 등가하는 씹음의 사전 행위만의 절취는 결국은 거대한 하나의 먹음의 깔끔하고 명료한 결과물로 환원되며 오직 그것으로만이 이 무용함의 사전 단계의 행위를 지나간 것으로 또 의미 있는 것으로 실은 (결과를 위한 의미라는 점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혁발


남성의 우위에 있는 여성, 낮고 얕은(?) 남자를 혐오하며 우습게 여기는 몸짓의 여성, 개처럼 혀로 다리께를 핥는 유사 접촉 행위는 비행위의 상상적 효과만의 생산만을 낳는다. 이 두 위계적 성의 진단, 다름 아닌 관능화된 여신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을 무화한 채 그것을 가상으로 환유하는 비행위의 노동은 섹스의 변형이자 예정된 지속적 실패이며 비도덕적 욕망을 도덕적인 이성으로 치환한 눈 뜨지 않은 감촉의 엄금 행위이다. 이러한 실패는 제도적 음란물(?)의 엄금이라는 인위적 차단의 재현이며 그것으로 생산되는 도덕적 효과의 의도치 않은 차이로 (재)생산된다.

 

변영환


돈벼락 뿌리기와 마네킹 머리 위에 올린 사과에 ‘끝없이 못 박기’, 은밀하고도(전유) 공공연한(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가치로 바꾸는) 돈을 뿌리며 자유의 욕망을 맛본다는 것은 이 동전의 질료적인 측면, 쨍한 사운드와 반짝거리는 시각의 늪으로의 경험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한편 돈에 노출된 천박한 욕망을 환유적으로 구현한다. 그 속물적 의식을 어떤 교환의 질서로 수렴하고자 여기에 어떤 목적을 부여하지 않으며 고스란히 그 돈을 질서 없이 뿌려댈 뿐이다. 윌리엄 텔의 사과를 재전유하며 그것에 가해지는 충격은 오히려 사과보다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것인 가운데, 그 사과 자체에 촘촘히 과잉으로 못을 채워 어떤 간격을 없애는 것은 숨 막히고 또 구역질나는 인위성을 띤다. 곧 사과를 죽이는 것의 과잉 축적은 사과를 못-사과, 못으로 덮인 사과라는 아상블라주된 사물·오브제를 구현하는 것으로써 작품 자체와 끝을 등가시키는(사실은 그 균열만이 부각되는) 행위와 그것의 중단적 행위의 두 선형적이고 단절적인 일련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박주영


돌을 목 뒤로 걸고 그 무게로 불편함의 신체가 형성된다. 하중으로부터 생성되는 신체적 현존, 그로 인한 상승적 다가가기의 불가능한 교신의 실패의 반복, 이는 그가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음의 실제적 한계 영역을 이상적인 초월의 열망과 그것의 실패의 영역으로 재현하는 것인데 여기서 실상 그는 현실의 인간, 우리를 대표하며 재현하는 한 명의 남자를 불러 그 행위 곁에 세워 둠으로써 이를 바라보는 우리를 그 안에 묶어 두며 그 바깥에서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불가능성의 거리가 체현되는 것을 감각하게 한다. 


박주영은 이 목걸이를 돌에 걸어 극 안의 부채라는 상상적 장치를 실재를 매개하는 잉여로 끌고 나오며 우리의 타자성이 생겨나는 실제적인 순간을 기적처럼 천연덕스러운 방식으로 만든다. 오히려 앞선 과정은 (이에 비하면) 전혀 중요치 않은 것인데 (돌을 받은 그가 나임을 전제하는 한) 그녀라는 타자로부터 끌어내어지는 타자성은 그것을 제공하는 그녀로 작품의 질문을 수렴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이 작품은 (그녀가 아닌) 내가 겪은 어느 증여적·부채적인 하나의 일회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영진 


담배로 뒤덮인 일종의 필터가 되어 담배 연기를 받아들이기, 환경에 경종을 울리는 따위의 메시지를 건네는 표층은 신체에 대한 물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곧 그 불가능성을 체현하는 신체만을 부각시키는 일회적 해프닝의 실패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실재·실제적 측면을 드러내는 퍼포먼스.


유도화


욕설·비난·불평 따위가 적힌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그것을 읽기, 쉼 없이 과격하게 타이핑하는 여성의 손을 찍은 스크린, 곧 영상은 욕설-주체의 현존을 가상적으로 보충한다. 반면 얼굴이 나오지 않기에 어떤 특정인으로 그 주체를 한정하지 않는 한편 그 손과의 거리 속에서 다시 욕설 주체로부터 우리 스스로 거리를 형성하게 된다.


비행기는 관객에게 거리를 갖고 순식간에 도달하며 또는 손아귀를 빠져 나간다. 곧 퍼포머와 우리의 거리는 그의 단단한 현존을 알리고 거리의 참여를 보장하며 개개인 그 자체에 그 자리를 둠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환기시킨다. 곧 그 욕에 젖어들게 하지 않으며 그 욕을 실제 나중에 시현하는 퍼포머의 욕 역시 그의 몸에 체현되며 한편으로 그 즉시 벗어난다. 어떤 재현으로서 이 욕은 욕을 가진 스테레오 타입들을 드러내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회 구조적인 일차원의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비나라


먹을 것들을 제의적 테이블 안에 배치하며 일렬로 줄 세우고 그것을 밟아 뭉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얼굴을 꽁꽁 감싸고 드러내지 않는데, 이는 퍼포먼스의 실현이 자의적이고 어떤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행위를 두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세적인/전근대적인 먹을 것과 의식(의식)적 행위는 그것의 가치·의미를 순식간에 전도하는 (먹지 못할 쓰레기로 만드는, 단지 그것의) 과격성의 격발을 통해 전위성을 얕은 차원으로 한정지으며 그 드러나지 않는 얼굴의 함의로 그 의도의 차원을 다시 돌리게끔 한다. 


오히려 이는 퍼포먼스의 자의적인 구문의 영역이라기보다 니캅( ‘과격한 베일’) 따위의 베일을 쓴 여자들의 문화적 금기 영역에 대한 순수한 분노 차원에서 (또한 그것이 퍼포먼스로 드러낼 때 갖는 역설의 차원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곧 그녀의 베일은 그 문화(적 편견)의 재현(이자 그 스스로를 그 개인적 분노로부터 가리는 이중적 베일)에 가까울 것이다


‘444초의 형식’


444초의 ‘한정된’ 형식은 어떤 사전적인 규칙으로서는 사후적인 해석 차원에서만 어떤 제약으로 작용한다/작용할 것이다. 곧 이미 444초가 하나의 형식이 될 때 이는 가능성도 불가능성도 아니며, 오히려 불가능성의 가능성의 차원에 가깝다. 반면 현장의 규칙으로 이는 다시 시간의 메트로놈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종을 치는 행위는 이미 지나간 것을 연장하며 지정하는 것이며 그 규칙 자체의 실패, 규칙에 속박되는 작품을 또한 지정하는 것이다. 외부의 메타 규칙이 작품의 시간성/몰입성을 외재적인 차원에서 균열 나게 하는 지점은 ‘이것이 진행되고 있음’의 의식 자체를 함께 떠안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4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 곧 그와 같은 상징적인 기호 차원은, 4로부터 이 필연적인 숫자가 태어났다는 것도 실은 그것이 규칙으로 적용될 때 7/8분 정도의 시간이라는 측면을 제하면, 자의적인 숫자 기호에 불과하다. 4의 상징 차원의 해석은 또 다른 형식에 불과하며 작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시간에 쫓긴다는 것, 빠르게 그치게 한다는 것, 최소한의 필수적인 것만 보여준다는 것은 시간을 속도로 바꾸는 것이며, 작품에 관한 빠른 섭취를 용인한다는 것. 그럼에도 이는 이미 작품이 펼쳐지고 있음이 너무나 ‘확고해질’ 때 더 이상 의미 없음으로 변질된다. “What is next?”와 이 444초의 규칙이 접합될 때 현재가 아닌 단지 다음이 예비된, 다음에 대한 기대만으로 이뤄진/현재에 대한 염증만으로 이뤄진 시간을 만나게 된다. 미래는 이미 당도해 있고, 현재는 그 미래에 대한 기다림만으로 점철된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이 축적되고 있음, 의미 없음의 의미들이 산출되고 있음을 대체 가능한 시간들, 의미 있음의 증발됨으로 바꾸고 있는 이 기호는 가령 ‘실험예술’로 표방되는/묶이는 많은 예술들의 현실에서의 처절한/절박한 기호를 의미하는 것일까. 한 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열린 시간’의 차원으로 이 숫자 세기가 관객으로 자연스레 연장되어 있으며, 더 이상 어떤 거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축소된 거리는 이곳이 하나의 ‘판’이라는 것-징과 공명하는-을 나타내는 한편, 더 이상 신비감과 풀 수 없는 기호들의 예술에 대한 해석적 시선이 필요하지 않은, 다시 말해 충족되기 어려운, 모든 것이 그리고 예술 역시 이미지들의 옮김과 전해 받음으로 이어지는-가령 스마트폰과 카메라로 찍으며 그것을 전달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관객의 모습과 함께- 어떤 시대와 공명하고 있음일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