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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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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9. 02:09 Anth-e-nada(작품 포커스)

2012한국실험예술제 개막식 퍼포먼스

 

 

 

2012한국실험예술제 개막식이 홍대 상상마당 앞에서 열렸다. 먼저 포클레인 퍼포먼스가 열었다. 포클레인의 삽으로 와인이나 막걸리를 관객들에게 따라주는 퍼포먼스였다. 

 

이어 김태윤 작가의 개막 퍼포먼스가 열렸다. 현장에 없는 여러 작가들과 현장의 관객들이 모바일 기기에 쓴 문장이나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퍼포먼스였다. 정창래 의원은 첫 번째로 "술 중에서 제일 맛난 술"을 묻고 이어 "예술"이라고 답하며 포문을 열었다.

 

 

양자주, 장콸, 박현지 이상 세 명의 작가가 한 번에 접속해서 하나의 스크린에 이들의 드로잉이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퍼포먼스는 “바퀴가 있는 곳이 길이고 바퀴가 있는 한 길은 영원하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하나의 현장에 있는 각 사람들의 스마트폰기기들은 실제 소통을 이뤄내는 차원에서 쓰이지 않는데, 하나의 현장에서 그리고 설사 다른 곳에 있더라도, 하나의 소통을 이뤄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작가의 의도였다.

 

'홍대 앞 문화를 진단하다', 토크 퍼포먼스

 

 

오후 3시경 열렸던 2012한국실험예술제 퍼레이드는 큰 규모로 화려했지만, 개막식 분위기는 잔잔했다. 마치 요즘 낮은 덥지만 밤은 쌀쌀한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을 반영한 듯했다.

 

개막식 퍼포먼스에 이어 진행된 토크 퍼포먼스에서 민주통합당 정청래 의원은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을 능가할 만한 곡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며 최근 출장을 다녀온 국가인 폴란드에서 ‘강남스타일’에 맞춰 폴란드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말춤’을 추고 있는 현장을 봤다고 전했다.

 

김백기 한국실험예술정신 대표는 홍대 앞을 28년째 지키고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곳이 세계적으로 드물다면서 관객들을 향해 홍대 앞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했다.

 

2009년 '스트리트 H' 매거진을 창간한 장성환 대표는 “삼십년 정도 홍대 앞에 있으면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잡지를 만들고자 했다.”고 전했다.

 

이어 장성환 대표는 ‘강남스타일’이 인기를 얻는 데 대해 “강남보다 홍대가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동네가 재미있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실험예술제를 통해서 더욱 재미있는 동네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사회를 맡은 한젬마 작가는 홍대 작업실을 튼 지가 11년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홍대에 오랫동안 계셨던 분들이 “옛날이 그리워.”라는 말씀을 많이 하는 이유를 그런 말이 왜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을 패널들에게 던졌다.

 

김백기 대표는 홍대 앞 문화는 9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진 문화로 당시에는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나갔는데 2000년대 들어 클럽이 상업적인 공간으로 변함에 따라 예술가들이 홍대 앞을 많이 떠나게 되었다고 전했다.

 

올해까지 스트리트 H를 통해 동네 소식을 모두 볼 수 있는 포털 사이트를 만들고자 한다고 전했다. 포털사이트들이 통사 오륙개월에 한번 지도를 업데이트하지만 스트리트 H의 경우 한 달에 한 번씩 사이트를 업데이트한다고 전했다.

 

정창래 의원은 홍대 앞을 세계 제일의 예술의 거리의 메카로 만들고 임대료 상승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가들의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제공하고자 전했다. 첫 번째 국내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가 문화창작 발전소(문화 복합 단지)로 발전해 나가고자 하는데, 현재 발전소가 이사할 공간을 찾지 못해 중단된 상태라고 전했다.

 

김백기 대표는 베를린을 갔다 오면서 예술가들 자생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생각했는데, 그 하나의 대안이 ‘버스킹 문화’였다고 전했다 카페 등에서도 예술가들이 공연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며 많이 감명받았다고 전했다

 

정창래 의원은 홍대에는 다른 것들이 많다며 “사람, 색깔, 아이디어, 예술가들의 자유, 가능성, 희망”도 많은 반면, 부족한 것들도 많은데, “예술인들에 대한 배려, 활동 공간, 현장, 국가의 보호”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윤진섭 평론가는 어느 도시든 랜드 마크가 있는데, "홍대 앞"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다며 당인리발전소를 박물관으로 만들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라이브클럽 빵’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등 대표는 “대통령을 잘 뽑아줬으면 한다. 이상한 사람 뽑으면 우리 돈이 그냥 땅바닥에 들어간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예술이든 시민이든 상식을 갖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실험적 음악 공연들

 

 

토크 콘서트가 끝나고 막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자 갑자기 외국인들이 무대 앞에 난입해 춤을 췄고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판이 만들어졌다.

 

김우주천왕의 ‘으르렁~ 쾅!’하는 사운드와 함께, 전자 비트와 리듬을 만들어 내는 패드 연주가 뒤따르는 독특한 연주가 무대에 올랐다. 일종의 일렉트로닉 음악의 경쾌함과 클럽 음악의 춤추기 좋은 비트가 만들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그것을 감싸는 매우 격렬한 끓어오름의 사운드와 노이즈였다.

 

긴 머리에 마스크를 쓴 작가의 이미지가 그에 잘 맞아떨어졌다. 교통 소음 등이 중간에 뒤섞여 들기도 했고, 몇몇 피처링이 배경음악으로 섞여들기도 했다.

 

 

‘내귀에 도청장치’는 독특한 분장에 뇌쇄적인 보컬 이혁을 비롯하여 몽환적이면서도 탄력적인 리듬의 폭발적 연쇄 과정을 밟아 나가며,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무대 앞쪽의 펜스를 치우자 관객들이 다 몰려가서 환호를 외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멈춰 그들의 무대와 함께 했다. 앙코르를 두 곡이나 했고, 세 번째 앙코르가 나올 때 사회자의 멘트로 끝이 났다.

 

2012 한국실험예술제의 개막식은 인터액티브적 라이브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홍대 앞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 보는 한편, 대중의 힘을 얻는 음악 공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공감과 열광을 함께 얻었다.

 

<ARTROAD PROJECT, 바퀴>라는 주제로 열리는 2012 한국실험예술제는 호주·핀란드·아일랜드·스웨덴·미국·영국·스페인·덴마크·폴란드·에스토니아·일본·스위스·캐나다·독일·멕시코·프랑스·한국 등 17개국의 아티스트들이 참가하며, 이후 16일까지 홍대 앞에서 ‘아트로드’를 만들어 나간다. 9월 23일까지 제주도·대전·부산·익산·남해·하동 등 전국적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축제 장소를 확대하여 아트로드를 확장해 나가게 된다.


 

[축제 개요]
  - 제목 - 2012한국실험예술제 - 아트로드 프로젝트, 바퀴
  - 일시 : 2012년 9월 8일(토)~16일(일)
  - 장소 : 홍대 앞 일대 거리, 포스트극장, 요기가 표현갤러리, 서교예술실험센터, 횡단보도, 버스, 지하철, 옥상 등
  - 주제 : 아트로드 프로젝트, 바퀴
  - 주최 : 한국실험예술정신(KoPAS)
  - 주관 : 한국실험예술제 운영위원회, ANU communication
  - 참여 국가 : 호주, 핀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미국, 영국, 스페인, 에스토니아, 일본,
스위스, 캐나다, 독일, 멕시코, 프랑스, 한국, 중국 등 (17개 국)

협력축제
  - 에스토니아&라트비아 : DIVERSEUNIVERSE
  - 독일 : International Printer and Performance Festival
  - 한국 : 익산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 부산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 남해 바다 미술제, 제주 탐라대전, 광주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서울시, 마포구, 독일대사관, 김달진미술연구소,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메트로

 

posted by 아트신
2011. 8. 7. 16:32 Anth-e-nada(작품 포커스)



Steve Vanoni는 관객들을 무대로 세워 적극적인 참여자로 만든다. 관객은 객석에 위치하지 못 하고 프로시니엄 아치에 올라가며 무대 중앙에 관객에서 다국적 관객들을 한 명씩 불러와서 의자에 서게 하고 각각 신은 신발들에 대한 멘트를 더하고, 걷기 챔피언을 뽑는다. 면 대 면 커뮤니케이션을 만드는 시간이다.

이어 무대 바깥으로 관객들을 소몰이 하며 통에 바지를 내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다 일어나 바지를 추어올리고 관객들을 향해 통에 들은 것을 흔들어 쏟아 붓자 관객들은 기겁하고 식물의 잎들이 쏟아지는 트릭을 완성한다.

무대로 들어와 관객들을 원으로 세우고 샴페인을 눕혀 바닥에 돌려 샴페인의 주둥이가 가리키는 방향의 사람에게 샴페인을 수여한다. 스티브 바노니는 관객을 게임의 주체로 무대에 섞는 동시에 어떤 아픔이나 고통, 내면의 깊숙한 고민 따위 없는 즐거운 축제의 현장을 수여한다.

Mrat Munn Htwann은 “물어(bite)”라는 단어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객석에 침입해 관객에게 자신을 물고 자신은 관객의 신체를 무는 행위를 이어 나간다. 세기를 크게 해 자국을 남기는 목적이 있는 듯 보이고, 테이블 위에 달걀들을 놓고 머리로 모두 깨뜨린 후 무스 성분의 흰 파우더 같은 것을 그 위에 뿌린다. 마치 다지고 달걀을 묻히고 튀김옷을 입혀 하나의 요리로 자신을 비유하는 듯하다.


뼈다귀가 무대 위에서 투여되고 한 빙은 그것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고 혀로 칼을 핥는다. 뼈다귀로 온 몸에 문지른다. 이는 현시되지 못 하고 어떤 지나간 시간 차원에 머물러 있다. 나뭇가지들로 울타리를 만들고 향을 피운 공간에 뼈다귀들을 한 움큼 안고 들어가 있다. 뼈다귀는 죽은 자의 영이고 이를 의식을 지운 채 죽음의 의식에서 위무하는 것이다. 곧 관객은 온전히 느낄 수 없는데 약간의 스산함만을 느낄 뿐이다.


오픈 스페이스 베를린은 가톨릭의 교황의 옷을 입고 권위를 체현한다. 이는 시대를 비껴난 것을 의도적으로 제시한다. 향 그릇에 향을 피우고 그릇을 두드린다. 의식을 집중시키는 의식적 행위는 소리가 없고 의식을 침잠시킨다. 반복적인 화음 단위의 종교적인 노래를 이어 같이 부르며 관객도 같이 동참하게 된다.

촛불을 나누고 샴페인을 터뜨린 후 샴페인으로 한 명 씩 세족식을 행한다.

교황의 권위를 밑으로부터 출현시키며 모성의 편안함과 굽어 살피는 시선을 전체로 옮긴다. 곧 가톨릭 제의식을 전유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시공간을 삶에 수여하는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11. 8. 7. 16:28 Anth-e-nada(작품 포커스)



우주비행사복, 색색의 화려한 아프리카 원주민 차림, 스쿠버다이빙하는 사람 세 사람(경계없는예술센터)이 하나의 조합을 이뤄 홍대 거리를 그저 걷는다. 달에 착륙한 우주인이 한 발 한 발을 경이롭게 걷듯 걷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천천히 어리둥절하게 사람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현실 적응에 대한 감각의 과잉에 잠깐의 시선을 뺏기게 된다. 도시로 떠난 여행은 도시 속 여행의 순간을 안겨주는 셈이다.


강성국 작가의 떨판으로서 몸은 어떤 무용수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경로 속에 자신의 춤의 열정을 체현해 낸다. 몸의 튕김, 솟구치듯 다시 위태롭게 균형을 맞추는 보폭, 손과 발의 힘이 쏠려 구부러져 있는 모습까지 온 몸에 힘이 자리해 있음을 느낀다.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노이즈 사운드가 스피커를 부수고 나올 것 같이 쿵쾅 대고 그는 수조 속으로 들어가 물을 쳐대며 어떤 자신의 삶에 깃든 분노 따위를 쏟아낸다.


슈양 작가는 구슬 같은 아주 작은 오브제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행인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들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이는 말을 건네고 동의를 구한 후에 가능해지며 동의를 구하지 못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가기도 한다.

퍼포먼스 아티스트로서 특별한 면모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심하게 또는 귀찮은 대상을 만났다는 듯 별 의식 없이 그를 지나친다.

현대인의 소통이 이뤄지기 어려운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들을 자신의 사진기에 담는 일종의 한 순간의 추억, 자신에게는 자신이 아닌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과의 기억, 사람들은 잠깐의 한 순간의 경험으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적인 기억들이고 공적인 기억이 아니다. 특별히 하나의 경험이나 형태로 간추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느끼는 기억이 다르고, 구슬은 아티스트가 주는 하나의 선물이자 소통의 미디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작가에게 내밀한 경험을 불어넣고 퍼포먼스의 주체를 역전케 하는 것이다.


스핑터스 팀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며 팝과 뮤지컬 음악적으로 편곡된 곡들에 맞춰 움직인다. 특별한 움직임이나 따로 부르는 노래는 없었다. 흰 캔버스에 미끄러져 내려가는 유연한 붓질이 시원함을 더한다.


일본 전통음악에 맞춰 아이를 업고 무시마루가 춤춘다. 죽은 신체가 아닌 시간을 되돌린 어느 한 시점에서.

죽은 신체의 현시도 아니고 다만 음악에 도취, 관객을 상정치 않는 그럼으로써 아우라를 형성하는 표현주의적 과도함에 빠져 있다.

곧 스스로 다른 세계에 있다.
엄밀히 부토의 양식도 아닌 부토 흰 색 칠을 한 기괴한 듯 움직이는 그만의 독자적 움직임이다.


병들이 놓인 흰 펠트 천 위에 고깃덩어리를 흰 줄로 묶어 끌고 들어온다. 그것을 양옆에 놓고 병들을 하나씩 천 위에 던져 깨뜨린다. 모두 깨뜨리고 손에는 피가 새어 나오고 실재적 감각으로 전이되어 온다.

중간에 손으로 자리를 만들며 생채기가 나고 객석에서 한 명을 끌고 와 안고 하나의 곡이 끝날 동안 있다. 야성적인 면모, 불완전한 감정과 폭력은 떨리며 따스한 스킨십이 오가는 가운데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폭력과 깨진 병은 음악 포옹 이성 간의 사랑과 묘하게 병치된다.


 

posted by 아트신
2011. 8. 7. 16:12 Anth-e-nada(작품 포커스)

 

Boyet De Mesa는 천을 가장자리부터 중심을 향해 가지런하게 잘라간다. 이것들을 관객들에게 마스크로 씌우고 관객석 위로 위치해 탄압으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을 부른다. 또 그 부당한 압제에 항거한다.


제임스 토플은 두 팀으로 갈라 여러 게임들로 상황을 빠르게 전환하며 속도의 리듬을 탄다. 빠른 템포는 관객들에게 생각할 시간보다 참여에 대한 충동과 판단을 종용한다. 곰 내지 호랑이 되기의 토템 의식의 맥락이 전제되어 있고, 필연적으로 호랑이와 곰이 되어 인간되기를 지향하며 게임의 승리를 위한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고, 영상에 나오는 문맥을 체화하고 인지해야 한다.

day로 측정되는 며칠간의 되기 과정은 왜 곰이 왜 호랑이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 것과 엉덩이만을 계속 카메라로 잡는 유희적인 화면을 만들기도 하고, 직접 그리기나 노래 부르기 등의 퍼포머가 되어야 하는 시간들도 있다.

 「I Love You」를 "감사합니다"의 노랫말로만 이어진 노래로 재편하거나 그저 길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토플의 모습 뒤에 스쳐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매우 불완전하고 안정되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 등 한국의 상황을 외국인의 관점에서 한국에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에 의한, 또 다른 이질적인 우리에 대한 시선이 감각된다.

하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내러티브의 과정이 한국어로 번역되지만, 제대로 그 언어의 문맥이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곧 한국적 맥락을 가져가고자 하지만 질문과 시선이 우리에게 친숙치 않은 여전히 낯선 것과 같다.


슈양은 중국‧미국‧한국‧러시아 등의 우리말 발음을 관객에게 물어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 낸 후 립스틱으로 종이에 받아 적고, 립스틱을 한 손에 고르게 펴 바른 후에 관객 몇몇에게 악수를 청하고 "DMZ"라고 적은 종이에 손을 처대서 글자가 번진 종이를 들고 관객에게 보여준다. DMZ에서 확장된 냉전 체제, 여러 제국 세력들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것들이 융해된, 그래서 그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수행의 몸짓을 투여한다.


오픈 스페이스 베를린은 “naked kitchen”이라 적은 커다란 바람을 채운 커다란 비닐 구조물에 들어가 요리를 하는 것을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으로 생중계한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뒷받침해 주고 지배하는 기타의 노이즈 사운드가 의식의 집중을 방해하고, 축제의 순간으로 일상을 열어젖힌다. 다만 요리를 하고 이것이 라이브라는 사실에 비추어, 또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리의 현장을 만든다는 점에서 일상의 리듬을 재편하며 퍼포먼스를 성립시킨다. 사운드는 어떤 것도 지정해주지 않고, 불협화음만을 창출할 뿐인데 요리의 리듬을 하나도 살려주지 못 한다. 마치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가 아닌 비닐 안의 불투명한 존재들의 자취를 지정해 주듯이.

이러한 새로운 정보가 유입되지 않고 냄새를 통한 음식이 되고 있다는 것만의 인식은 매우 지루하면서도 약간의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긴 시간의 지속 반복된 리듬 하에 요리한다는 단순한 전제가 주는 자장에서 우리는 퍼포먼스를 본다고 느끼기보다 그 안에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감각은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특히 이 퍼포먼스는 무대 밖에서 파티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맥락이 무대 안으로 들어오며 삭제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무대 바깥에서 잠자코 그들을 보는 관객의 입장은 꽤 괴로운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11. 8. 7. 16:07 Anth-e-nada(작품 포커스)

메트로놈 박자는 움직임의 박자를 지정하는 기본 전제로 작동된다. 둘은 발레 바를 두고 마치 거울처럼 같은 움직임을 형성한다. 움직임은 몇 박으로 이뤄져 있고 동시에 몇 박자로 분절되어 있는 셈이다.

박자로 나뉜 움직임은 같은 속도로 지속되고 달라지는 몇 가지 동작은 그 시작점을 보지 않으면서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시작과 과정을 모두 같은 속도로 똑같이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기계적인 움직임은 일종의 메트로놈이 지정하는 박자를 완전히 움직임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이고, 메트로놈 박자에 귀속되면서도 그 똑같은 지루함의 박자, 아니 단지 하나의 기본 리듬으로 깔리고 있는 박자를 움직임의 단위로 재편해서 화음적인 신체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곧 매우 음악적인 신체, 전시를 통하지만 사운드가 중첩된 움직이는 신체-오브제로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11. 8. 7. 16:05 Anth-e-nada(작품 포커스)



Julie Jaffrennou는 움직이지 않는 신체, 그렇지만 신체 그 자체를 매우 잘 조명한다.

떨리는 몸, 의지에 의해 구속하지만, 실은 구속될 수 없는 신체의 자율성을 드러낸다.

흰색의 녹는 옷은 그녀 위에서 떨어지는 채에 걸러지는 물방울들로 인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녹아내려 신체가 조금 더 드러나게 된다. 설치적 신체를 구현하지만 역설적으로 신체의 유동을 표현하며 시간은 옷의 녹아내림으로 드러나고, 신체에 집적되는 피로도로 명시화된다.


박일화는 명상을 동반한 다도의 느리고 은근한 시간을 몸으로 구현해내고, 또한 선녀의 정화되고 순수한 기원으로서 신체를 아우라로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차와 명상, 정화를 통한 치유 의식을 관객에게 투여한다. 관객은 음악에 맞춰 춤추고 손잡고 원으로 돌아 뛰며 일상과 일상에서의 무거운 짐들을 훌훌 털어버리게 된다.


오라이언은 일상을 퍼포먼스 문맥으로 변화시킨다. 한 시간 동안 소몰이를 하며 관객들을 이동시켜 한 명씩 각종 홍대의 가게들에 들어가 점원 등으로 일하게 하고, 한 시간 후에 출발 장소에서 다시 만나는 원칙을 세운다.

관객들은 퍼포먼스의 시간 동안 일상의 시간과 중첩된 일상과 예술의 시간의 경계를 오가는 묘한 시간의 영역에 위치하며 새로운 시간의 감각, 일상과 공간(홍대)에 대한 시선의 재편을 경험할 수 있다. 다만 코드화된 일상에 틈입하는 장치를 간단히 투여함으로써 일상의 감각을 재편하고 퍼포먼스의 문맥을 가져가는 것이다.


물고기를 머리에 이고 가며 에스토니아 두 작가는 시를 읊고 간다. 그녀가 먹는 물고기에 자신을 투여하는 일종의 초월론적 관계의 문맥을 만든다.

그녀의 뱃속에 들어간 고기가 나라면 난 그녀와 직접적인 육체를 맞닿게 된다. 그 외에도 동물을 섭취하는 인류의 오랜 생존 방식에 대한 문맥도 깔려 있다. 죽은 생선을 머리에 쓰고 감으로써 생선 되기의 토템 의식적 성격이 내비치는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11. 8. 7. 15:57 Anth-e-nada(작품 포커스)


중계식으로 퍼포먼스를 진행할 때 그 시작은 이쪽 현장에서 시작된다. 곧 여기가 그쪽에서 중계되거나 표상되지 아니할 때 그는 퍼포먼스를 시작할 수 없다. 김백기 예술감독이 ‘여기가 다 준비가 됐다, 이제 시작해도 된다.’고 할 때 퍼포먼스는 이미 거기에서서의 작가 '성백'의 시작이 아닌, 여기서의 시선과 현장에 있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시작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사람 두상의 정수리 부근 구멍이 뚫린 조각에는 식물이 나 있고, 여기에 흙을 뿌리며 또 그 흙을 입에 넣으며 그리고 카메라 앞 놓은 비닐에 흙을 뱉으며 끝난다.

기타 소리가 서정적으로 울리는 가운데 환경에 자신의 의식을 불어넣고 현실을 초월하는 듯한 몽롱한 화면에서 작가는 존재한다.

스크린은 현실을 매우 다르게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으로, 그래서 사실상 매개 과정의 간극을 통해 그 존재함이 묘하게 현실을 중개한다.

▲ 심철종

심철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자신의 실존적 의식의 자장에 반복해서 집어넣는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는 말은 계속 튀어나와 현재의 생각을 앞지른다. 이것은 유예되고 다시 반복되게 되어 있다. 나는 살아있지만 지금은 살아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이런 긴박한 의식적 흐름의 구성은 그를 지우고 목소리만 남아 내면의 갈급함에 손을 내민다.

메트로놈보다 빠른 박자의 언어는 의미와 이미지를 생성하는 이야기와 현실의 구조를 만들지 않고, 생각과 의식에 앞서는 언어, 무의식의 언어 조각들이 강박적으로 그를 사로잡고 있다. 언어는 결코 생각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이것이 거의 말해지는 대로 말하는 것이라면.

임택준은 붉은 줄을 무대 양 옆으로 크게 달아 놓고 그것을 당겨 팽팽한 장력에 자신의 실존적 몸부림을 더한다. 구도자적 여정과 같은, 또 내면의 명상적인 침잠의 사유를 더하며 순수한 이념의 언어의 힘을 빌려 현실을 나아간다. 이는 정신적 수행에 가깝고, 나오는 노래 역시 목소리 자체에 이념과 삶을 일치시키는 진정성의 노래다. 지금은 올 수 없는 이전 시대의 목소리와 노래.

▲ 유지환

유지환은 매우 즐거운, 어떤 이념도 표상도 재현도 없는 놀이의 규칙을 가진 즉석의 즐거움을 무대에 전이시킨다.

관객들을 9명 선정해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마스크를 모두 쓰게 해서 수치심을 관객으로부터 없애게 하는 일종의 작가 스스로의 방편으로 제시된 규칙을 따르게 된 이들에게, 총 소리가 나고 이에 맞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죽는 또 하나의 규칙이 주어지고, 관객들은 아니 퍼포머는 한꺼번에 죽는 게 아니라 수차례 나뉜 그 죽음의 연기(演技)를 통한 연기(延期)의 순간을 수행한다. 이것이 다다.

▲ 조은성

조은성은 삶을 퍼포먼스 무대에 끌어온다. 장뇌삼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데, 언니가 자궁경부암이 걸렸다는 진단을 듣고 난 이후, 굳이 삶을 퍼포먼스와 분리하거나 그녀가 당면한 문제를 벗어나거나 하지 않고 그녀는 이것을 무대 위에서 먹으며 무대에 펼쳐 놓는다. 일부러 검은 화면에 검은 글씨로 타자를 치고 나중에 커서로 그것을 긁어 한 문장으로 표현함은 대화를 하기보다 잠잠한 자신의 내면을 조용하게 건네는 측면에서 유효하다.

▲ 문재선

문재선은 하프처럼 생긴 조명 장치가 달린 구조물을 가져와 무대에 놓고 물을 쟁반에 붓고 바닥에 몸을 밀착하며 물을 숨으로 천천히 깊숙이 빨아들이고, 바닥에 입을 대고 천천히 숨을 쉬어 물을 바닥에 새어나오게 한다. 이는 물을 명백한 크기로 그 줄어듦과 옮겨짐을 감각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물과 바닥과 내지는 쟁반과 신체가 숨을 통해 접합되어 있고 몇 번의 옮기는 과정의 물리적인 결과물 안에 여러 숨과 행위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하는 것에 가깝다.

더군다나 바닥에 흩뿌려진 물을 자신이 처음 벗었던 바지로 훔치고 무대를 물러난다. 어떤 결과물도 실은 남기지 않는 것이다. 다만 행위의 과정만, 신체의 집중성의 표현에 대한 미감과 사유로서 신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유도화'는 ‘현장성 감각 인상을 채집’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녀는 마치 관객과 유리된 듯 작은 텐트 같은 곳에서 시야를 넓게 확보하지 않고 관객과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고 있는데, 한편 이는 명백하게 무대의 관객에게서 유래하는 시선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사유가 조각되는 과정을 대화의 언어가 아닌 독백과 글의 언어로 표현한다.

이는 작가의 사상의 지문이 채취되는 순간이기도 하며 자신은 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타자의 수행은 있지만, 그녀의 생각만이 몇 초의 간극, 곧 몇 개의 단어들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지 과정의 경로에 비추어 그것이 조금 뒤늦게 파악되는 과정 속에 의미의 형성 과정의 간극을 겪게 만든다.

동시에 이 사유가 오가는 과정에서 물리적인 결과물을 형성하지 않는 것의 현실을 메타적으로 언설하며 그녀는 아무 것도 만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적극적으로 관객이 채워 넣는 퍼포머로서 위치를 수행함을 이야기한다.

관객을 망원경으로 살피고 그 인상을 적는, 곧 시선의 문제, 그리고 무엇이 직접적으로 수행을 하는 주체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녀는 오히려 관객을 관찰하고 관객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대상일 수 있는 주체, 주체일 수 있는 대상, 퍼포머와 관객의 위치를 역전하면서도 그 경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흥미롭다.

▲ 김은미

김은미는 주차장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비닐 위에 자신의 대변을 놓고 거기를 엉덩이로 깔고 비빈 후 손에 묻혀 무섭지 않다고 쓴다. 자신의 뱃속에 있었지만 사실 지저분하게 인식하는 일종의 모순과도 같은 우리 사유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다.

▲ 방효성

방효성은 앉아서 손을 사용하지 않고 상추를 입으로 씹고 먹은 뒤 어기적거리며 먹은 뒤 그것을 옷에 닦는다. 신체를 통과한 오브제, 그리고 신체-오브제적인 설치로 자신을 드러낸다.

▲ 변영환

변영환은 돈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간단한 퀴즈를 통해 인식시킨 후 동전이 담긴 통을 몇 개 관객에게 나눠주고 큰 투명한 원통에 그것들을 담게 한 후 가득 찬 투명 원통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얹고, 만 원짜리 음악과 함께 지폐를 단 자전거를 탄 인형이 움직이는 사이에 지휘를 하고 로댕을 끈으로 묶어 들어 올리고, 돈이 든 원통을 쓰러뜨린다. 돈에서 실존하는 존재의 구출이자 목에 걸린 줄로 인한 자살을 시키는 것이다.

10440개의 비, 비를 숫자로 셈으로써 오히려 더 추상적인 비를 체감케 한다. 그리고 셀 수 없는 시간이 거기에 새겨진다. 이것은 시다. 작가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시는 마치 설화와 같이 작가와 함께 사라진다. 어딘가의 기억으로부터 유래되는 시.

▲ 이혁발

이혁발 작가는 몸을 장애인처럼 놀리며 일상의 몸을 포기하고 새롭게 신체를 조각한다. 마치 공룡처럼 손목을 꺾어 내밀고 혀를 내밀어 또 다른 변이를 이룬다. 이는 뇌성마비 작가 강성국의 몸을 자신이 체현한 것으로 재현이면서 실은 타자에 대한 초월론적 소통의 길을 구현코자 하는 것이다.

▲ 이승택

이승택 선생은 거의 생애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에이즈 퍼포먼스’, AIDS 문구를 쓴 휘장을 팔에 두르고, 세밀하게 조각된 성기 조각을 막걸리를 부은 통에 끼워 관객들에게 종이컵에 따라 준다.

에이즈의 심각성을 유희적인 재미와 일 대 일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변용시키는 가운데 하나의 퍼포먼스가 끝나고, 여자가 뒤로 돈 나신의 커다란 설치물을 들고 위치를 바꾸며 그 중간에서 혀를 내미는 익살을 표한다.


나이를 뛰어넘은 매우 재미있는 장난이자 설치물과 신체 간 관계를 역동적인 그림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지막에 설치구조물 앞에 나와 기념사진을 찍어 오늘 자리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자리함으로써 이날 실행된 퍼포먼스 시간들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경험의 순간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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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5:35 Anth-e-nada(작품 포커스)


▲ 홍오봉

“new world disorder”, 스판덱스 천을 팽팽하게 관객들에게 당기게 해서 그 위에 타고 몸을 뒹군다. 예술은 아슬아슬한 것이라 말하며 찢어지기 전의 긴장을 예술로 비유한다. 또한 퍼포먼스가 이뤄질 수 있는 동력을 어떤 참여의 측면에서 찾고 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퍼포먼스 진행 중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그러한 소통을 통한 퍼포먼스 구현을 위한 말 걸기 전략인 셈이다.

결국 무게를 못 이기고 찢어지게 됨으로써 퍼포먼스는 예측 불가능한 현재와의 단절, 예술이 될 수 없는 순간을 예술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끝을 맺는다. 물론 이러한 비예측성의 시간은 시간이 더 남아 그가 자잘한 이야기를 덧댄다.

김춘기 작가는 자신이 직접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무대 커튼에 붙인 종이에 프로젝터를 쏘아 우리나라 지도를 비추고 큰 강의 흐름이 선으로 그려지며 4대강 공사를 강행하는 정부 정책에 반기를 직접적으로 드는 내레이션을 덧댄다. 그리고 풍선을 지도의 구멍 사이로 불어 터뜨리며 4대강 공사의 위험을 감각적인 자극의 순간과 함께 예고하듯 드러낸다.

▲ 흑표범

흑표범은 커다란 장막 스크린에 덮이고, 영상은 그녀 신체를 통과하게 된다. 미디어와 접합되는 신체는 영상으로 인해 사라지면서 미디어가 입히는 감각이 스크린-신체로 체현되게 된다.

개의 걸음을 매우 가까이 비추거나 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빠른 영상의 전환이 예측 불가능의 정보의 집적과 변환, 그리고 유사 계열의 표면의 계열로만 드러나는 이미지가 존재로서 완전한 형태를 그려내지 못 하며 의식들을 파편화시킨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실재적인 감각 사이의 양자 간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왕치

왕치는 사탕과 초콜릿에 관한 자신의 내밀한 추억들을 이야기로 푼다. 작가가 부여하는 초콜릿에 대한 심상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지만, 어떤 한 시대를 표상하는 단편이 거기서 발견될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걸고 이야기만으로 추상적이고 불확정적인 저마다의 심상을 하나의 각기 다른 무대로 치환시키는 심상의 작용이 퍼포먼스의 주요한 이야기다.

신진식은 자신이 직접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피하고,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성들을 비슷한 계열의 옷을 입게 해서 무대 위 오브제-미디어로 투여한다. 한 사람씩 나와 약간의 짜증 섞인 표정을 무대에 드리우며 연극적인 상황의 연기를 덧대는데, 이는 시간이 간다는 것만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어떠한 이미지도 주지 않기 때문에 빈 정보의 공간에서 관객들은 저마다의 심상, 사회적인 문맥을 무대로 끌고 오며 무기력하게 의식을 놓고 눕는 여성들의 잠깐의 표정이 주는 의미를 판단할 수밖에는 없다.

▲ 안정

안정은 머리에 외계인 같은 송신 기능의 큰 귀를 부착하고, “똑~딱”, 두 음절을 좌우로 고개를 왔다 갔다 하며 관객에게 보내고, 이는 그 크기를 빨리하는 템포의 조절로 또 너무나 쉬운 하나의 리듬 체계로서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유희적 재미를 덧대 퍼포먼스를 지속시킨다.

▲ 김석환

김석환은 지구본을 우산대에 끼워 들고 등장, 지구대를 빼서 닦고 갈아 마치 지구를 정화하고 새롭게 영토를 구축하는 과정을 가져간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문맥을 환경 또는 전쟁과 같은 것, 또는 인간 그 위에서 지구를 하나이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이론과 같은 시선을 투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무혜

무혜는 미디어 잡지 이미지들을 속옷과 같이 붙여 요란한 장식을 한 몸을 무대에 전시하며 무대 위로 올라가 그 종이들을 하나씩 떼어 씹으며 관객을 마주본다.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미디어의 홍수에 대한 메시지는 날카로운 시선의 순간으로 획득되지만, 그 자체로 미디어-신체로 기능하며 그러한 삶의 터전을 확장시켜 드러내고 있다.

▲ 박주영

푸른 돌고래를 들고 들어와 무대 위 바닥에 걸어두고 그릇에 담은 레몬들을 자신의 몸에 쏟아 붓는다. 이어 바이올린을 키며 레몬을 자신의 머리에 짜낸다. 자신의 내면을 무대로 확장하는 것이자 자기 치유적 의미들이 들어간다. 레몬은 일종의 신체적 정화의식, 바이올린은 내면에 대한 정화의식에 조금 더 가까운 듯싶다.

▲ 안치인

누워서 인간 컴퍼스가 되어서 흰색 분필로 원주 일부분으로서 네 부분을 완성하고 구역을 상정하며 투명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 두 팔을 위로 벌려 잡고 좌우로 왔다 갔다 허리를 트는 체조를 돌아가며 한다. 투명 수조에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들을 넣고, 수조 속으로 담근 호수로 바람을 집어넣어 기포를 낳고 물을 머금은 채 마이크에 대고 기포 소리를 낸다. 풍경을 부채로 불어 소리를 낸다.

사운드-신체 내지 사운드-오브제, 사운드-오브제-신체의 통합적 미디어를 이룬다. 대상에 영향을 주는 메트로놈 박자와 같이 기계적으로 계산된 행위들이 인접하며 분절적으로 신들을 이어감으로써 사운드 환경에 놓이는 신체와의 영향 관계를 조망하게 된다.

▲ 류환

류환은 붉은 빛 조명에서 얼굴을 보던 신문지로 감싸고 묶은 뒤 흰 풍선을 불어 젖힌다. 음악은 혼란스러운 리듬을 직조하고 그러한 거친 에너지에서 퍼포먼스는 동력을 함께 한다. 풍선을 불어 터뜨리며 감각의 자극을 선사한다.

▲ 성능경

성능경은 ‘자지 랜턴’을 관객들에게 비추고 나서 "압(up)" 네 번 정도 소리를 키우며 내고, 조명도 그에 따라 점층적으로 밝아진다. 숨 쉬는 걸 의식적으로 하면 굉장히 불편해진다고 하고 퍼포먼스로 숨을 쉬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낸다. "다운(down)"을 네 번 정도 외치며 조명도 점층적으로 줄어든다.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숨을 쉴까요?', 질문하고 부자들이 숨을 쉬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솜방망이를 꺼내들고 'stick of money'라고 칭하며 ‘나는 당신에게 주겠다. 지금부터 돈 방망이 받아라!’하며 관객석에 침투하여 무차별한 폭력을 선사한다. 부자들이 어떻게 숨 쉬는지 보여주기보다 돈을 가져다주는 주술적 대상의 힘을 전제하고, 폭력을 의식儀式으로 실은 장난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 심홍재

심홍재는 종을 치며 등장하여 노란 천을 깐 바닥에서, 노란 천 주변에 긴 나무 막대 오브제를 열 두 구역으로 나누어 분배하고, 십이지인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쓴다. 바닥에 사람은 땅을 본받는다는 “인법지(人法地)”를 쓰고, 베개를 설치하고 종을 치며 물러난다. 설치 구조물을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제의식적 측면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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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5:18 Anth-e-nada(작품 포커스)

▲ Non Grata(에스토니아)

퍼포먼스는 문 앞에서 극장으로 나가는 통과 절차에서부터 시작해 다시 야외로 나가는 일련의 흐름을 끊김 없이 이어간다. 서로 각기 다른 퍼포먼스는 중단되지 않고 마치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것 같고, 이는 아티스트들의 자발적인 동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과 별도의 진행의 매개자를 두지 않고 팔루스의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트는 지점에서 쉽게 획득된다.

극장에서는 이명박 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정치적 의제들을 꺼내 동의를 요구한다. 정치적 내파가 외국 아티스트를 통해서 한국 상황에 대한 리서치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놀랍고도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지위의 전복과 유희를 통한 그것에의 달성이 오히려 폭력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이성적 판단을 무마시키는 집단적 소요의 상황에서 선택의 갈림길을 만드는 참여를 부추기며 이러한 체험을 통해 우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반추하게 하는 듯한 시선을 읽게 된다.

▲ Non Grata(에스토니아)

아트카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보닛 위에 앉아 가랑이 사이에 긴 붉은 풍선을 놓고 봉고차 뒷문을 열어젖힌 채 그 열린 공간으로 성기의 이전된 오브제로서 풍선을 들이밀었다 꺼냈다 하는 것, 일상에 투여된 반복의 힘이 큰 흐름에서의 박자 단위로 재편되는 것이다.

여기에 닭을 주차장 천장에 세게 던져 떨어뜨리며 소리를 내는 SP38, 사토 유키에의 기타가 멜로디를 형성하지 않는 기타를 치는 행위에서 현에의 마찰이 곧 매질로 공간을 뒤덮는 것, 단순한 반복의 유형을 형성하는 리듬과 다채로운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메가폰으로 같은 어구를 계속 반복하며 관객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알 파독의 말이 각각의 사운드들의 층위들과 마찬가지로 대위법을 만들고 또 빈 공간을 파고들며 의식을 무화시킨다.

이 빽빽한 틈은 사운드의 쌓임, 또 몇 개의 사이클이 시작과 주기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반복으로 인해 만나며 불협화음적 하모니가 상정되며 일상을 혼란스럽게 조직하는 큰 에너지의 동력을 보여준다.

▲ Rubens

검은 옷에 한 쪽 가슴을 들어내고 몸 뒤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간 기묘한 형상을 한 조각적 설치의 대상물로서 있는 영상 안 여자와 상반신의 가슴을 드러내 놓고 하얀색의 대비되는 의상을 입은 몸피가 큰 여자가 자신의 살을 바늘로 꿰매며 그녀와 실존적인 관계 맺음을 수행한다.

사람으로 감각되는 영상 속 존재와 만날 수 없는 간극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미디어에 대한 성찰이 들어가 있다. 자연의 숲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평화롭게 나타나는, 스크린이라는 무대는 매우 단조롭고 살을 꿰매는 행위 역시 살가죽이 지방으로 두터운 그녀의 몸에 피는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도 않으며 특별히 부각되는 임팩트‧박자의 요소도 없다.

지난 예술제에서 비명을 지르며 주선율 악기가 베이스로 깔린 채 진행되었던, 그래서 감정을 건드리는 음악이 비명과 함께 아픔과 삶을 감각케 했던, 또 직접적인 대면의 관계를 형성하는 측면은 비워진 채로 남게 되었다. 실제 살과 살을 꿰맨다는 것, 사실 제 살과 스크린의 플렉시블 스크린을 꿰맨다는 것은 놀랍게 들리지만, 실제 보았을 때 별 감흥은 없는 것이다.

▲ The physical poet

움직임 자체만으로 흐름을 잇기보다 일종의 연극적 구성을 취하게 된다.

내레이션이 나오고 시간적 배경과 목소리의 존재, 서술적 흐름을 모두 가져간다. 아들이 죽었고 제의를 통해 다른 영적 매개자가 아들을 살려내고 다시 만나는 순차적인 흐름을 갖고 또한 분절적인 시퀀스들을 음악의 변화를 통해 가져간다. 따라서 죽은 육체의 움직임이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나기보다 어떤 연결선상에서 움직임이 한정되는 면이 강하다. 음악의 전환은 일종의 의식에 대한 트랜스를 형성한다.

▲ Julie Jaffrennou

생고기들과 누더기 같은 옷을 연결해 신체와 다시 연결한다. 곧 동물의 살은 작가의 피부 내지 신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은 매우 무미건조하며 실제 살에 바느질을 가하는 것은 아니어서 마른 신체를 지닌 작가의 몸에 상해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고깃덩어리 신체로 분해 온 몸을 또 다른 피부로 덮고,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에 의식을 담그고 있다. 그 두터운 신체 밑에서 의식은 희미하고도 내면에 귀착되고, 침묵 속에 표현되지 않는다. 덧씌워진 신체는 분명히 또 다른 자신의 신체로 부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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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9. 02:53 Anth-e-nada(작품 포커스)

▲ Orion Maxted

'남북통일에 관한 국민투표', 고양이와 개 각각에게 개와 고양이라고 인식시키고 서로는 서로의 적이라고 역시 인식시킨다. 이는 한 문장씩 쓰인 하얀색 하드 보드지를 앞에 들이미는 것으로 이뤄지고, 실상 인식시켰다는 전제 하나의 규칙만을 상정시킬 뿐 고양이와 개에게 지시적인 언어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한다.

개와 고양이는 검은 막으로 단절되어 있다. 다만 이는 남북 역할로 가정된 전제가 있는 가운데 인위적으로 경계를 설정해 놓은 것으로, 그 경계를 차단했을 때는 의자 위에 오른 고양이와 밑에서 짖어대는 개의 긴장 영역이 발생하게 된다.

애초에 개와 고양이와 첫 대면을 시킨 것부터가 둘의 싸움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일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곧 인위적인 경계가 보호막 기능을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에도, 막이 올라가는 순간 개는 고양이를 향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짓고, 이러한 방어적 공격행위는 고양이에게 폭력 행위로 다가오게 된다.

이념의 언어는 실상 이들에게 무용하지만, 이러한 사전 학습의 시간은 적을 인식하는 개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도 같다. 남북 간 경계는 없어져야 되냐는 질문지가 적힌 긍‧부정의 대답을 요구하는 종이가 관객들에게 나눠지고 관객은 개와 고양이로 양분된 공간의 투표함에 그 표시를 해야 한다.

정치적 견해는 무엇이나 통용될 수 있는 반면 경계라는 것, 무엇보다 인식이라는 것은 형성된 것이고, 또 새로운 시선을 작동시키지 못 하게 하는 것이란 것과 개와 고양이에게 인간의 의식을 부여하며 인간과 매우 친숙한 무언가를 생산한다고 해서 소통 체계를 같은 언어 코드로 이룰 수 없다는 당연한 현실도 보여준다.

▲ Chakkrit Chimnok

Chakkrit Chimnok은 각종 오브제들을 꺼내고 원을 흰 색으로 두른 후 작업 공간과 설치 무대를 형성한다.

젬베를 젓가락으로 치고 들어오던 그는 그 단순한 박자의 나열이 하나의 흐름과 호흡-시간을 만들어 빈 공간을 드러내며 요란함의 덧없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머리를 잘라 묶어 붓처럼 만들고 흰색 분진에 얼굴을 비벼 하얗게 만든다.

사다리와 테이블을 하나씩 각각 가지고와 무대에 놓고 사다리를 두드리며 같은 리듬을 만든다. 이런 단순하며 변화 없는 박자는 적막한 공기와 혼합되며 대위법을 이룬다고 보인다. 하나의 사운드가 아닌 사다리에 올라간 그는 흰 비닐 풍선에 채워진 물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영상에는 춤을 추는 클럽으로 보이는 공간에 선남선녀가 춤을 추는 영상이 흐르고 있고, 이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는 흰 긴 비닐에 바람을 불어넣어 묶고 채워, 영상에 걸고 사다리에 몸을 싣고 풍선을 불어 터뜨린다. 풍선이 터지는 감각과 바람이 채워져 있는 풍선은 같은 의미 계열을 이룬다. 곧 영상의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 둔 현시적 재현은 실제 찰나와 같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일깨우는 듯하다. 어김없이 탁자를 두드리고 의식을 단조롭게 담금질한 후 그는 흰색 분진에 얼굴을 문지른다.

또한 같은 박자들의 반복이 이어지고 그는 얼굴을 옷으로 닦는다.

그는 중간에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갈아입었었는데 다시 원래의 옷을 입음으로써 퍼포먼스의 종언을 알린다. 짐들을 챙겨 사라진다.

▲ 시몬

비행기 소리가 무대를 가르고 노이즈가 유동하는 스크린의 영상과 맞물려 집중의 흩어짐을 지속시킨다.

우주와 우주 밖에서 지켜 본 지구의 모습, 은하의 빛, 이것들의 아우라 평이한 멜로디에 시몬은 숨을 조율하며 호흡을 끊이지 않고 이어가며 마치 무술을 하듯 에너지를 단단하게 몸에 내재한 채 격하게 움직이다. 돌연 멈춰 숨을 뭉텅 내뱉으며 호흡하고 있다.

이는 큰 귀를 달아 더 큰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존재하며 극단의 몰입이자 일종의 자기 암시가 동반된 개인적인 행위의 이것은 법칙화되지 못 한 채 신비한 질서에서 관객의 최면을 종용한다.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다 알아들을 수 없이 중얼거리며 무엇을 돌려 빻아 바닥 위에 올린다. 무대 위에 올라가 붉은 조명 아래 한 차례 더 춤-명상을 더하고 사라진다.

▲ Ville Karel

Ville karel는 임의로 관객석 앞쪽에 있는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내 무대 바깥으로 몰고 간다. 우선 선택된 자가 먼저 퍼포먼스를 볼 수 있어 퍼포먼스의 구성원은 선택되고, 시작 역시 지정된다. 조금 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참여적인 관객을 만들 수 있다.

Villekarel는 몇 가지 음료수와 술을 번갈아 마시고 마시자마자 게워 내는 자극적인 장면들을 감각에 치닫게 만든다. 팔에는 무대에서 쓰인 ‘비현실’을 칼로 되새긴다. 이것은 선택된 자를 위한 선물이 아닌 선택된 자들에 대한 폭력의 선사이자 선택받지 못 한 사람들을 향한 의식에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비현실’은 비현실이라고 여기며 벗어나고 싶을 만큼 실재적 감각에 치닫는 현실이다.

라이브 아트는 무엇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무엇이든 실시간으로 신체와 내지 의식과 연결된 무언가를 생산해 내야 함을 의미한다. 곧 이는 매우 단순하고 동물적인 행위들과 맞닿게 하는 측면을 초래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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