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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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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0. 15:57 카테고리 없음

(텍스트로 정리, 2013 한국실험예술제 중 서울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된 대부분의 퍼포먼스들에 대한 리뷰/비평입니다.=원고지 70매 좀 안 되는 분량) 사진은 추후 함께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임택준


심장 박동에 상응하는 메트로놈의 박자를 따라 내면의 상징물인 의자로부터 공간을 둘러싼 설치의 행위, 그 둘의 불균형적 공존과 함께 그 행위의 리듬을 수여하며 균열을 낳던 사운드가 숨의 옥죔으로 현시되는 결말, 곧 분리적 사운드의 이질감이 신체를 현상하고 있었고 어떤 파국까지 예고하고 있었다는 것, 이것은 그래서 설치를 퍼포먼스로 전이하는 과정이었다는 표면 아래 간과될 수 있는 것은 사운드의 절대적인 효과이다.


곧 우리의 숨과 일치되는 어떤 체현적 환경의 구현과 그 극적 결말의 고양이라는 점에서 설치는 설치의 완성을 위한 예비적 순간인 동시에 잉여적 순간이었으며 실제로는 메트로놈처럼 단조롭고 위태하며 벗어날 수 없는 옥죔을 ‘너’의 신체와 ‘나’의 신체의 겹침과 균열에 사로잡히거나 사로잡히지 않는 그런 이 환경 안에 있음으로부터 파생하는 두 신체적 반응의 비동시적 동시성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박이창식


밀가루 반죽을 오물거리며 씹고 뱉은 뒤 그 총합을 벽에 던지기, 그리고 그 찰나적 충격의 순간/진동과 어김없는 떨어짐의 유예된 순간, 그 스쳐지나가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끝, 형태적 변화 없음과 화학적 변화의 차이를 물리적 행위로 바꾸는 것, 일종의 씹음의 섭취 행위를 바로 무용한 배설의 행위인 공간 안의 투척으로 일종의 ‘배설-섬島’을 만들고 그것들을 다시 수거한 뒤 원래의 형태로 합치고 던지기, 곧 일종의 분리와 합체 행위, 아니 비분리적 (공간 안에) 나눔과 숙명적인 합의 궤적인 셈, 곧 모든 것은 이 한 순간을 위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 ‘결말’은 일종의 충격이고 일종의 편의적인 나눔이라는 논리적 해석으로 소급하는 것은 오히려 어떤 카니발리즘적 의식 행위, 냉소와 거만/여유로움이 묻어 나는 얼굴이 걸림돌로 튀어 오르며 마치 그의 이입할 수 없는 얼굴의 반대편에서 이 (일종의 비체卑體들로서) 개체들의 생존과 ‘숙명’의 힘이라는 뜻밖의 공상적 서사를 빚어내게 된다.

 

홍오봉


일종의 지신밟기의 전통적 의식을 상기시키는, 많은 이들의 참여로 형성된 팽팽한 천-대지 위를 한 명이 올라타 지나가는 행위로의 귀결, 거기에 사람들 틈을 삐져나오며 도착하는 분홍 긴 풍선들의 새의 궤적 같은 움직임, 빨간 물결의 대한민국의 집단적 열광에 상응하는 일종의 ‘놀이’ 형태는 우리의 익숙한/잊힌 문화적 디엔에이의 감응을 거쳐 되돌아오며 작가 고유의 과잉의 활력 에너지로 거듭나고 전해지는 한편, 사람이 올라타 가라앉는 그러나 결코 찢기거나 하지 않는 대지의 굳건함과 그 무게가 지정하는 건강함으로 그 경험을 소급시킨다.

 

이유희란


“안녕들하십니까?”/“Are you (guys) doing good?”의 교차적 무한 반복, 그 와중에 자기로 소급되는 분무기에 축적해 자신의 얼굴을 가격하는 정화/폭력 행위, 곧 외부로 향해야 할 악에 대한 투쟁적 격발이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진단적 이성으로 한데 그러모아지며 “안녕하십니까”가 갖는 일련의 사태, 곧 그 인사의 방향이 결국 자기 자신임을, 그리고 정확히 그 내재적인 분노/무기력이 바깥으로 확장되며,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끝없는 외부로 향하며 무한 파급되는 광경으로서의 사태를 재현하며 일종의 (이 퍼포먼스 안에서의) 가상의 일원이 되는 것, 여기서 관객은 정확히 “안녕하십니까?”에 대한 답변으로서 “예./아니오!”가 아닌 “안녕하십니까?”로 서로에게/자신에게 안부를 건넸어야 했다. 


이 점에서 이 퍼포먼스는 곧 한 명의 분노와 그것을 안는 (결코 관객에게 분출하지 않았던) 이성의 슬픔을 보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유효하지 않음을 비극적으로 지켜보는 단 한 명의 관객이 되는 것이다(곧 ‘실패는 실패를 낳는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절박한 무엇이었지만(그 표면상에서가 아니라) 한편으로 퍼포먼스의 정치성이 재현이나 그것에 한 발을 걸친다고 (예술이 정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너무 매력적이었는데 밥솥을 진 ‘아낙’과 수영복을 입은 ‘모델’의 부조화적 조응은 전자의 민족을 국민으로 대응시키고 후자의 쇼를 퍼포먼스의 자극으로 대응시키는 것 가운데 드러났다.

 

신진식


444초 동안 한 겹씩 옷을 벗기를 실행하는 세 명의 ‘여성’, 이 동일하지 않은 동일자의 형상은 가령 퍼포머가 아닌 여성이라는 성으로 환원된다. ‘인류의 반’은 거기에 아마 해당하고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 곧 무개성적 개성을 지닌 퍼포머들은 ‘수줍음’을 어떤 건조한 마주칠 수 없는 얼굴 속에 현상시키고 있었는데, 이는 동시에 그것을 들여다보기의 관음증적 욕망으로 전도시키는 바였고, 우리 역시 그 얼굴의 반대편에서 그 얼굴처럼 그 은밀한 그러나 분명한 욕망을 은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거의 옷을 벗는다기보다 옷을 훔쳐내며 동시에 신체를 타자(관객)의 그것으로 훔쳐내며 가학적 시선의 행위와 피학적/수동적으로 머무는 신체 움직임의 대응 쌍이 그 안에 있었다. 결국 속옷들을 벗겨 내지만 누드는 없다. 그 전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상하고 기대하기 자체에서 이미 초과 달성된 욕망의 누수가 선연하게 그 흔적들의 탑이 쌓아지고 있었다. 444초의 제한 아래.


Michael Steger


금빛 페인트로 칠한 의자를 갖고 등장해, 누드에 붉은 계열 긴 가발을 쓰고 그 의자를 밟아 부수고 쇼핑을 하러 가는 몬스터, 누드가 낯섦과 낯설지 않음으로 드러남에서 가발-머리를 흔들며 일종의 남자도 여자도 아닌 혼종적 경계의 괴물로 거듭나는 착시적 풍광으로, 그 찰나적 순간에 각인된 타자의 형상이 틈을 벌린다. 쇼핑에 중독된 현대인이라는 끝없는 소비로 감추는 자기 소외의 현상이라는 진부한 재현 뒤에 어떤 인간 그 자체의 연약함과 지극히도 개인적인 정서의 체현이라는 부분에서 갖는 균열, 곧 그 균열에서만 이 작품의 지극한 슬픔의 양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선 그 결정적 순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 어떤 해소할 수 없는 내면, 채울 수 없는 현장과의 괴리를 그 지나친 온 몸의 흔듦으로 해소하고 채우려는 움직임이며, 그 알 수 없는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슬픔의 작품 외적으로만 지적하고 또 드러나야 할 그 부분은 곧 이 작품과 현실과의 경계를 묻는 한편 그 작품이 현실로 추락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곧 봉인하고 해제해야 할 부분은 미리 해제됐고 애매하게 재봉인되며 사라진다. 


한큐


일초에 한 명, 무대에 늘어나는 관객은 퍼포머-주체를 숫자-세기를 통해 불러내며 그의 부재를 대리하며 그를 육화하는 수많은 신체가 된다. 이는 사실상 대리전(代理戰)이었고 주체가 없는 가운데 퍼포먼스가 일어날 수 있는가의 실험이었다. 그 사실(‘선험적 퍼포머의 현존의 부재’)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몫 없는 자리에 대한 기대와 호응은 그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에서 그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바뀌어 가는 가운데서도 계속되는데, 애초에 이는 숫자 세기를 처음 인도한 이에게로 수렴된다. 


숫자는 인원을 넘어서며 포화된 무대는 이 반복된 의례적인 숫자 세기가 그 주체의 나타남과는 상관없이 끝을 향하고 있고 그 끝을 단축시키기 위해 한편으로는 이 숫자 세기의 프로그램을 인지하고 있고 또 그 기인하는 바를 확인하기 위해- ‘끝으로 가는 퍼포먼스’로서-숫자 세기를 빠르게 한다. 성능경 작가가 그것을 위임받은 자였는데 위임의 사전 단계, 그리고 보증의 구현 과정, 집단행동의 의식 만들기로 그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것이 다다. 말이 (이미) 있었고 말이 (뒤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 퍼포머와 관객이 절합되는 형식으로 주체 역시 분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Frederic Krauke


비늘을 덮은 인간-물고기, 요는 인간의 물고기 되기라는 신화적·토템적 의식으로 그 불가능성의 이상은 불쾌함과도 닿아 있다. 생선에 입을 맞추다. 냉동된 생선을 깨물어 겨우 부분을 떼어내고 신체를 훼손하며 그 고통에 부르르 떠는 것은 자연스런 문명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비껴나며, 스스로를 지우고자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실패함으로 인한 불가능성의 현존이 불가능성의 결합에 대한 이상을 오히려 초과하며 고행의 측면은 그럼에도 자연에 있음의 추위와 자연에 육화되는 신체를 현시하게 된다. 신체 훼손은 예술적인 진정성의 측면과 안타까움 대신 자연이라는 대타자를 인식하는 상상적·감각적 차원으로 건너뛰게끔 한다.

 

성능경


444초를 세고 그 바깥에서 퍼포먼스가 일어난다. 일상적인 행위의 채집과 재현/구현의 자기 충족적/자가 완성적인 과정으로 이뤄진다. 여기에 숫자는 리듬이며 리듬의 기표로 그것들을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절한다. 그 444초가 끝나기 전에 퍼포먼스를 끝내지 않는, 마지막 1초를 끊임없이 나눠 444초를 유예함은 완벽한 끝(으로의 합치)은 불가능하며 그 시간을 무한정 늘리며 이것을 하나의 유희적 놀이의 규칙으로 전유한다는 것이다.

요는 이 444초의 규칙을 비틀며 또 그것을 이용해 기존의 자신의 퍼포먼스 형식을 재언표화하고 어떤 긴장과 그것의 지속으로 재위치시킨다는 것이다.

 

Tizo All


총을 관객에게 겨누되 발사하지 않으며 풍선을 향하되 그것이 격발되거나 되지 않는다는 것, 요는 후자에 있다. 전자는 나를 향한다는 점에서 실제적이나 실제 그것이 가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상상적이고 재현의 범주에 속한다. 후자는 이 장치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하는 것인 듯 보이지만, 격발되지 않음은 격발됨의 충격을 보증한다는 점에서 예측을 비껴나며 격발되기 이전의 순간을 연장한다. 그가 누드로 이것을 한다는 것은 벌거벗음과 성기에 대한 시선의 욕구는 있는 반면 실은 그 총이 남자의 성기의 상징물 정도를 대입하는 것 역시 이 작품의 결과적이고 인위적인 메시지의 측면과는 별로 상관없음을 알게 된다면 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순수한 격발’로서 자신을 하나의 매체 형식으로 제시하는 데서만 의미가 있다.

 

이정훈


“Change the world”와 “Change the president”의 두 문장을 메탈 조(調)로 교차 반복하며 무스를 자신의 눈과 입에 끊임없이 쏟아 붓는 것(이는 외부의 부조리한 압력을 은유한다). 두 문장에서 ‘world’는 ‘president’와 대구를 이루는데 곧 둘은 교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전자는 후자의 예비로서 존재하며 세계는 곧 대통령과 등가되는 것이자, 실제 바꾸어야 할 우선하는 것은 대통령임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냐는 물음을 작품이 사유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며 현재 일 년/일련의 사태를 적시하며 그것에서 기인하는 분노의 현상학은 그 무스가 보증하는 진정성의 측면과 함께 그 단어의 파급력은 오히려 개인의 이상과 감정으로 수렴되며 이는 관객들이 웃을 때 웃지 말라고 소리 친 그의 말이 유머로 다시 소환될 때 이 퍼포먼스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또한 가리키고 있다. 곧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대통령부터 바꿔야 하며 그것 외에는 사유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이 퍼포먼스는 결국 분노의 진정성 따위의 일회적 해프닝의 측면 밖에는 의미를 가져가지 못하게 된다. 반면 “Change the world”의 운율과 공명은 유희적으로 입에 남게 된다.

 

유지환


444명의 복제된 얼굴을 뿌리기,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약간 뿌린 물에 띄우기, 곧 시뮬라르크로서 ‘착시적 얼굴’은 후자의 과정으로 인해 현존의 은유로 바뀌며 그것을 공간으로 (배치하고) 다시 쓰레기로 (거두어) 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노동과 제의의 행위로 얼굴은 나의 신체적 현존을 보증하게 된다. 곧 시뮬라르크는 부재하며 오히려 행위/실제만이 자리하는 것이다.

 

Peter Rosvik


“What is next(다음은 무엇인가)?”는 444초(=죽음)에 뒤이은 또 다른 시작(재생), 그리고 수많은 라인업에 대한 기대적 소비에 대한 표면상의 이름에 다름 아니다. 다음은 올 것인가라기보다 다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고 이제 ‘소비’할 차례만이 남았다는 것, 지금에 대한 이야기, 지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간격이 현재에 삽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 곧 444초의 형식 위에 더해진, 그것을 소비적 문구로 완성하는 이 표제어는 물음이 아니라 하나의 슬로건이 된다.

 

신체에 굵은 호치키스를 박고 마지막으로 “What is next”를 완성하는 것, 벽은 곧 신체요, 신체는 벽의 물화에 다름 아니다. 배를 가격함은 그 아픔을 현장의 열기와 그것을 안고 ‘시간을 다스리는 주체’로서 감내해야 하는 한편, 그 가격됨에 대한 떨림은 완전히 상쇄할 수 없는 무엇으로 남는다. 신체를 훼손하고 막 다루는 것은 록의 체현이자 현시이며 결과적으로 장르의 재현이면서 그 장르의 연원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표구/대문을 완성함은 이것이 ‘시간’ 후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화되어 있음으로 남았다는 데서 가능해졌다.

 

Emily Kuhnke


발을 들어 자연을 환유하는 몸짓들, 그리고 누드, ‘신화적 표적’으로서 누드화 내지 마네킹-여신이 되는 것, 거기에 ‘이것이 마지막 주문이다’라는 기치 아래 저마다의 메시지를 붙이는 것, 일종의 관객의 조심스럽고도 열띤 참여의 의식(儀式)을 넘어서서 어떤 황홀함의 지경에 있는데, 이러한 초과된 정서는 관객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용인의 발화인 셈이며 한편으로 합치되지 않는 미끄러짐이기도 하다. 곧 그는 궁극의 낯섦 자체로 현상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저버리며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도망가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드의 충격은 그녀의 자연의 환유물로서의 의도와 얼굴로 인한 기이한 신체의 표현의 동시적 구현에서의 시차를 통해 유예되고 있다. 


Myk Henry


동아줄로 흑백으로 정확히 수직으로 나뉜 몸을 뱅글뱅글 감싼 채 긍정적인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부정적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각각 흰색과 검은색의 종이에 적어 그 줄-신체 위에 붙이는 참여, 그리고 불을 붙여 그의 신체를 불태우는 것으로 그 기억들을 대리 소각한다. 부정과 긍정에 대응하는 흑백은 하나로 뒤섞이고 진정 지나간 것으로 물질화하는 동시에 비물질화하는 공동의 공통 되기의 정화 작용은 예술가로 수렴되는 숭고함의 진정성과 모두의 조금은 깨끗해진 의식의 결과로 이어진다. 


실상 그 뜨거움을 도저히 이겨내지 못했던 아티스트로 인해 이는 온전한 신체의 고통과 극복의 동시적 작용으로 인한 숭고함을 생산하지 못하는 실패를 낳고 문자로 발화했던 관객들의 행위 역시 실패의 해프닝이 된다. 미묘하게 고통의 무릅씀은 이길 수 있는 고통으로 환원되어야지만 된다는 하나의 규칙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기에 당연한 것이다. 곧 비과학적·예측 실패적 오류를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Amy J. Klement


(일종의 하나의 눈으로서 신체인 커다란 깔때기로 덮은 얼굴 이어) 깔때기를 위로 쓰고 국기들이 쌓이는 매트릭스 윈도우로 변화하게 된다. 자신을 매체 판/매개 장치로 변형시키고 굴곡진 판으로 그 인격을 무화시키는 방식, 국기들을 자의적인 순서와 교환 가능한 형식으로 떨어뜨린다. 곧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의 대등한, 상징 이전의 기호의 방식으로 치환하며 놀이의 형식으로 재전유하는 것, 그리고 무화된 신체로 자신을 기표로 내세우는 것, 결과적으로 어떤 흰색 표면에 또 다른 투명함으로 과잉되는 얼굴만이 남는다. 이 얼굴은 수많은 국기들의 색, 실상 빛이 지나갔음에도 잠자코 있는, 낯섦을 낯섦으로 드러내는 눈동자이다. 곧 그 눈동자만이 남는다. 매체에 대항해 매체의 일부가 되는 매체적-비매체적 신체의 비동시적 동시적 현상


조은성


얼굴에 물을 붓으로 칠하기, 곧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비물질적 공명으로서의 물질적 효과, 주어진 것을 그 자체로 드러내기, 감촉의 감각과 비시각적 (비)생산의 시차 속에 작가는 계속 그림-행위를 하고 비-그림으로써 어떤 효과들만을 생산한다. 두 가지 다른 효과 속에서 시각은 실패하고 촉각과 어떤 착시적 시각 효과만이 남는다. 그 자체를 드러내는 생산하지 않는 생산은 그림에 대한 메타 차원의 접근이라기보다 안정적인 접촉의 매체 형식을 선택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문재선


공간과 결부되어 공간으로부터 새로이 신체로부터의 중심을 만들기, 공간을 신체로 옮기고 신체를 공간에 부착하기는 머리에 낀 얇은 줄로부터 가능해진다. 신체의 공간화는 공간의 중심을 만들기이며 여기서 신체는 자신의 무게와 반작용을 하는 낙하 이전의 신체, 그리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서의 이후의 신체이다. 실패하는 신체는 의도치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긴장의 시간은 신체가 공간으로 공간이 신체로 축소되는 동적 건축의 일부를 낳고 있었다.

 

방효성


와인/음료/귤을 먹고 그것을 씹어 뱉은 후 하나로 섞어 그것을 마시기라는 공동체적 카니발 의식, ‘비위’로 측정되는 현상은 다른 침들을 다른 하나의 동일한 물질로 환원시키는 사유적 의식 아래 유희로 변환된다. 먹음에 등가하는 씹음의 사전 행위만의 절취는 결국은 거대한 하나의 먹음의 깔끔하고 명료한 결과물로 환원되며 오직 그것으로만이 이 무용함의 사전 단계의 행위를 지나간 것으로 또 의미 있는 것으로 실은 (결과를 위한 의미라는 점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혁발


남성의 우위에 있는 여성, 낮고 얕은(?) 남자를 혐오하며 우습게 여기는 몸짓의 여성, 개처럼 혀로 다리께를 핥는 유사 접촉 행위는 비행위의 상상적 효과만의 생산만을 낳는다. 이 두 위계적 성의 진단, 다름 아닌 관능화된 여신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을 무화한 채 그것을 가상으로 환유하는 비행위의 노동은 섹스의 변형이자 예정된 지속적 실패이며 비도덕적 욕망을 도덕적인 이성으로 치환한 눈 뜨지 않은 감촉의 엄금 행위이다. 이러한 실패는 제도적 음란물(?)의 엄금이라는 인위적 차단의 재현이며 그것으로 생산되는 도덕적 효과의 의도치 않은 차이로 (재)생산된다.

 

변영환


돈벼락 뿌리기와 마네킹 머리 위에 올린 사과에 ‘끝없이 못 박기’, 은밀하고도(전유) 공공연한(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가치로 바꾸는) 돈을 뿌리며 자유의 욕망을 맛본다는 것은 이 동전의 질료적인 측면, 쨍한 사운드와 반짝거리는 시각의 늪으로의 경험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한편 돈에 노출된 천박한 욕망을 환유적으로 구현한다. 그 속물적 의식을 어떤 교환의 질서로 수렴하고자 여기에 어떤 목적을 부여하지 않으며 고스란히 그 돈을 질서 없이 뿌려댈 뿐이다. 윌리엄 텔의 사과를 재전유하며 그것에 가해지는 충격은 오히려 사과보다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것인 가운데, 그 사과 자체에 촘촘히 과잉으로 못을 채워 어떤 간격을 없애는 것은 숨 막히고 또 구역질나는 인위성을 띤다. 곧 사과를 죽이는 것의 과잉 축적은 사과를 못-사과, 못으로 덮인 사과라는 아상블라주된 사물·오브제를 구현하는 것으로써 작품 자체와 끝을 등가시키는(사실은 그 균열만이 부각되는) 행위와 그것의 중단적 행위의 두 선형적이고 단절적인 일련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박주영


돌을 목 뒤로 걸고 그 무게로 불편함의 신체가 형성된다. 하중으로부터 생성되는 신체적 현존, 그로 인한 상승적 다가가기의 불가능한 교신의 실패의 반복, 이는 그가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음의 실제적 한계 영역을 이상적인 초월의 열망과 그것의 실패의 영역으로 재현하는 것인데 여기서 실상 그는 현실의 인간, 우리를 대표하며 재현하는 한 명의 남자를 불러 그 행위 곁에 세워 둠으로써 이를 바라보는 우리를 그 안에 묶어 두며 그 바깥에서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불가능성의 거리가 체현되는 것을 감각하게 한다. 


박주영은 이 목걸이를 돌에 걸어 극 안의 부채라는 상상적 장치를 실재를 매개하는 잉여로 끌고 나오며 우리의 타자성이 생겨나는 실제적인 순간을 기적처럼 천연덕스러운 방식으로 만든다. 오히려 앞선 과정은 (이에 비하면) 전혀 중요치 않은 것인데 (돌을 받은 그가 나임을 전제하는 한) 그녀라는 타자로부터 끌어내어지는 타자성은 그것을 제공하는 그녀로 작품의 질문을 수렴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이 작품은 (그녀가 아닌) 내가 겪은 어느 증여적·부채적인 하나의 일회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영진 


담배로 뒤덮인 일종의 필터가 되어 담배 연기를 받아들이기, 환경에 경종을 울리는 따위의 메시지를 건네는 표층은 신체에 대한 물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곧 그 불가능성을 체현하는 신체만을 부각시키는 일회적 해프닝의 실패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실재·실제적 측면을 드러내는 퍼포먼스.


유도화


욕설·비난·불평 따위가 적힌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그것을 읽기, 쉼 없이 과격하게 타이핑하는 여성의 손을 찍은 스크린, 곧 영상은 욕설-주체의 현존을 가상적으로 보충한다. 반면 얼굴이 나오지 않기에 어떤 특정인으로 그 주체를 한정하지 않는 한편 그 손과의 거리 속에서 다시 욕설 주체로부터 우리 스스로 거리를 형성하게 된다.


비행기는 관객에게 거리를 갖고 순식간에 도달하며 또는 손아귀를 빠져 나간다. 곧 퍼포머와 우리의 거리는 그의 단단한 현존을 알리고 거리의 참여를 보장하며 개개인 그 자체에 그 자리를 둠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환기시킨다. 곧 그 욕에 젖어들게 하지 않으며 그 욕을 실제 나중에 시현하는 퍼포머의 욕 역시 그의 몸에 체현되며 한편으로 그 즉시 벗어난다. 어떤 재현으로서 이 욕은 욕을 가진 스테레오 타입들을 드러내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회 구조적인 일차원의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비나라


먹을 것들을 제의적 테이블 안에 배치하며 일렬로 줄 세우고 그것을 밟아 뭉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얼굴을 꽁꽁 감싸고 드러내지 않는데, 이는 퍼포먼스의 실현이 자의적이고 어떤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행위를 두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세적인/전근대적인 먹을 것과 의식(의식)적 행위는 그것의 가치·의미를 순식간에 전도하는 (먹지 못할 쓰레기로 만드는, 단지 그것의) 과격성의 격발을 통해 전위성을 얕은 차원으로 한정지으며 그 드러나지 않는 얼굴의 함의로 그 의도의 차원을 다시 돌리게끔 한다. 


오히려 이는 퍼포먼스의 자의적인 구문의 영역이라기보다 니캅( ‘과격한 베일’) 따위의 베일을 쓴 여자들의 문화적 금기 영역에 대한 순수한 분노 차원에서 (또한 그것이 퍼포먼스로 드러낼 때 갖는 역설의 차원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곧 그녀의 베일은 그 문화(적 편견)의 재현(이자 그 스스로를 그 개인적 분노로부터 가리는 이중적 베일)에 가까울 것이다


‘444초의 형식’


444초의 ‘한정된’ 형식은 어떤 사전적인 규칙으로서는 사후적인 해석 차원에서만 어떤 제약으로 작용한다/작용할 것이다. 곧 이미 444초가 하나의 형식이 될 때 이는 가능성도 불가능성도 아니며, 오히려 불가능성의 가능성의 차원에 가깝다. 반면 현장의 규칙으로 이는 다시 시간의 메트로놈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종을 치는 행위는 이미 지나간 것을 연장하며 지정하는 것이며 그 규칙 자체의 실패, 규칙에 속박되는 작품을 또한 지정하는 것이다. 외부의 메타 규칙이 작품의 시간성/몰입성을 외재적인 차원에서 균열 나게 하는 지점은 ‘이것이 진행되고 있음’의 의식 자체를 함께 떠안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4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 곧 그와 같은 상징적인 기호 차원은, 4로부터 이 필연적인 숫자가 태어났다는 것도 실은 그것이 규칙으로 적용될 때 7/8분 정도의 시간이라는 측면을 제하면, 자의적인 숫자 기호에 불과하다. 4의 상징 차원의 해석은 또 다른 형식에 불과하며 작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시간에 쫓긴다는 것, 빠르게 그치게 한다는 것, 최소한의 필수적인 것만 보여준다는 것은 시간을 속도로 바꾸는 것이며, 작품에 관한 빠른 섭취를 용인한다는 것. 그럼에도 이는 이미 작품이 펼쳐지고 있음이 너무나 ‘확고해질’ 때 더 이상 의미 없음으로 변질된다. “What is next?”와 이 444초의 규칙이 접합될 때 현재가 아닌 단지 다음이 예비된, 다음에 대한 기대만으로 이뤄진/현재에 대한 염증만으로 이뤄진 시간을 만나게 된다. 미래는 이미 당도해 있고, 현재는 그 미래에 대한 기다림만으로 점철된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이 축적되고 있음, 의미 없음의 의미들이 산출되고 있음을 대체 가능한 시간들, 의미 있음의 증발됨으로 바꾸고 있는 이 기호는 가령 ‘실험예술’로 표방되는/묶이는 많은 예술들의 현실에서의 처절한/절박한 기호를 의미하는 것일까. 한 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열린 시간’의 차원으로 이 숫자 세기가 관객으로 자연스레 연장되어 있으며, 더 이상 어떤 거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축소된 거리는 이곳이 하나의 ‘판’이라는 것-징과 공명하는-을 나타내는 한편, 더 이상 신비감과 풀 수 없는 기호들의 예술에 대한 해석적 시선이 필요하지 않은, 다시 말해 충족되기 어려운, 모든 것이 그리고 예술 역시 이미지들의 옮김과 전해 받음으로 이어지는-가령 스마트폰과 카메라로 찍으며 그것을 전달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관객의 모습과 함께- 어떤 시대와 공명하고 있음일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13. 12. 12. 16:57 카테고리 없음

120908

2012한국실험예술제 개막식이 홍대 상상마당 앞에서 열렸다. 먼저 포클레인 퍼포먼스가 열었다. 포클레인의 삽으로 와인이나 막걸리를 관객들에게 따라주는 퍼포먼스였다.
 
이어 김태윤 작가의 개막 퍼포먼스가 열렸다. 현장에 없는 여러 작가들과 현장의 관객들이 모바일 기기에 쓴 문장이나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퍼포먼스였다. 정창래 의원은 첫 번째로 "술 중에서 제일 맛난 술"을 묻고 이어 "예술"이라고 답하며 포문을 열었다.
 
양자주, 장콸, 박현지 이상 세 명의 작가가 한 번에 접속해서 하나의 스크린에 이들의 드로잉이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퍼포먼스는 “바퀴가 있는 곳이 길이고 바퀴가 있는 한 길은 영원하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하나의 현장에 있는 각 사람들의 스마트폰기기들은 실제 소통을 이뤄내는 차원에서 쓰이지 않는데, 하나의 현장에서 그리고 설사 다른 곳에 있더라도, 하나의 소통을 이뤄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작가의 의도였다.
 
'홍대 앞 문화를 진단하다', 토크 퍼포먼스
 
오후 3시경 열렸던 2012한국실험예술제 퍼레이드는 큰 규모로 화려했지만, 개막식 분위기는 잔잔했다. 마치 요즘 낮은 덥지만 밤은 쌀쌀한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을 반영한 듯했다.
 
개막식 퍼포먼스에 이어 진행된 토크 퍼포먼스에서 민주통합당 정청래 의원은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을 능가할 만한 곡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며 최근 출장을 다녀온 국가인 폴란드에서 ‘강남스타일’에 맞춰 폴란드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말춤’을 추고 있는 현장을 봤다고 전했다.
 
김백기 한국실험예술정신 대표는 홍대 앞을 28년째 지키고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곳이 세계적으로 드물다면서 관객들을 향해 홍대 앞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했다.
 
2009년 '스트리트 H' 매거진을 창간한 장성환 대표는 “삼십년 정도 홍대 앞에 있으면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잡지를 만들고자 했다.”고 전했다.
 
이어 장성환 대표는 ‘강남스타일’이 인기를 얻는 데 대해 “강남보다 홍대가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동네가 재미있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실험예술제를 통해서 더욱 재미있는 동네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사회를 맡은 한젬마 작가는 홍대 작업실을 튼 지가 11년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홍대에 오랫동안 계셨던 분들이 “옛날이 그리워.”라는 말씀을 많이 하는 이유를 그런 말이 왜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을 패널들에게 던졌다.
 
김백기 대표는 홍대 앞 문화는 9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진 문화로 당시에는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나갔는데 2000년대 들어 클럽이 상업적인 공간으로 변함에 따라 예술가들이 홍대 앞을 많이 떠나게 되었다고 전했다.
 
올해까지 스트리트 H를 통해 동네 소식을 모두 볼 수 있는 포털 사이트를 만들고자 한다고 전했다. 포털사이트들이 통사 오륙개월에 한번 지도를 업데이트하지만 스트리트 H의 경우 한 달에 한 번씩 사이트를 업데이트한다고 전했다.
 
정창래 의원은 홍대 앞을 세계 제일의 예술의 거리의 메카로 만들고 임대료 상승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가들의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제공하고자 전했다. 첫 번째 국내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가 문화창작 발전소(문화 복합 단지)로 발전해 나가고자 하는데, 현재 발전소가 이사할 공간을 찾지 못해 중단된 상태라고 전했다.
 
김백기 대표는 베를린을 갔다 오면서 예술가들 자생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생각했는데, 그 하나의 대안이 ‘버스킹 문화’였다고 전했다 카페 등에서도 예술가들이 공연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며 많이 감명받았다고 전했다
 
정창래 의원은 홍대에는 다른 것들이 많다며 “사람, 색깔, 아이디어, 예술가들의 자유, 가능성, 희망”도 많은 반면, 부족한 것들도 많은데, “예술인들에 대한 배려, 활동 공간, 현장, 국가의 보호”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윤진섭 평론가는 어느 도시든 랜드 마크가 있는데, "홍대 앞"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다며 당인리발전소를 박물관으로 만들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라이브클럽 빵’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등 대표는 “대통령을 잘 뽑아줬으면 한다. 이상한 사람 뽑으면 우리 돈이 그냥 땅바닥에 들어간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예술이든 시민이든 상식을 갖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실험적 음악 공연들
 
토크 콘서트가 끝나고 막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자 갑자기 외국인들이 무대 앞에 난입해 춤을 췄고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판이 만들어졌다.
 
김우주천왕의 ‘으르렁~ 쾅!’하는 사운드와 함께, 전자 비트와 리듬을 만들어 내는 패드 연주가 뒤따르는 독특한 연주가 무대에 올랐다. 일종의 일렉트로닉 음악의 경쾌함과 클럽 음악의 춤추기 좋은 비트가 만들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그것을 감싸는 매우 격렬한 끓어오름의 사운드와 노이즈였다.
 
긴 머리에 마스크를 쓴 작가의 이미지가 그에 잘 맞아떨어졌다. 교통 소음 등이 중간에 뒤섞여 들기도 했고, 몇몇 피처링이 배경음악으로 섞여들기도 했다.
 
‘내귀에 도청장치’는 독특한 분장에 뇌쇄적인 보컬 이혁을 비롯하여 몽환적이면서도 탄력적인 리듬의 폭발적 연쇄 과정을 밟아 나가며,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무대 앞쪽의 펜스를 치우자 관객들이 다 몰려가서 환호를 외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멈춰 그들의 무대와 함께 했다. 앙코르를 두 곡이나 했고, 세 번째 앙코르가 나올 때 사회자의 멘트로 끝이 났다.
 
2012 한국실험예술제의 개막식은 인터액티브적 라이브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홍대 앞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 보는 한편, 대중의 힘을 얻는 음악 공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공감과 열광을 함께 얻었다.
 
120909(야외)

사스키아 에덴스가 걸친 거울 장신구들은 그 앞의 이미지들을 흡수하고 변형시키며 빨아들였다 또 멈췄다. 독특한 에너지를 발현하는 장치로 인한, 그 속의 세계는 소용돌이와도 같은 이미지들의 흡수와 왜곡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자신과 상대방의 얼굴 사이에 거울을 놓고 비추자 앞뒤로 오가는 미세한 조율을 통해 그녀와 상대방의 얼굴이 뒤섞여 하나의 얼굴이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를 주변에서 직접 확인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실제 그 당사자가 되어 보면 이 일치의 경험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곧 타자의 시선을 거쳐야만, 그리고 그 이전에 작가와 다른 누군가가 함께 해야만 그와 같은 외부의 경험이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수행적이다.

내가 나나 타자를 보는 게 아니라 나와 타자의 혼종된 무엇을 본다는 것은 이 거울 세계가 지닌 독특한 반영의 결과다.

MYK HENRY는 “아트”에서 ‘아’를 의성어로 두고 길게 발음하며, 마치 오토바이를 타고 주행하는 듯한 소리를 낸다. ‘흑인’과 ‘유대인’ 등 대립적인 계열의 개념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오히려 차이와 분별을 통해서만 성립되는 언어의 기능을, 우리가 가진 차별 의식을 들여다보는 차원에서 활용한다. 이어 검은색 풍선을 터뜨리는데, 이러한 부풀림의 확장과 예고된 폭발로의 긴장, 그리고 판명한 끝을 내는 폭발의 순간 이후는 매우 단순한 것이면서 긴장과 완벽한 수행의 종말을 맞는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이는 야외에서는 더 큰 오브제, 가령 타이어를 활용해 더 긴 지속 시간과 그만큼의 파급 효과를 기대하게/두렵게 만든다. “Death(죽음)”을 이어 결론의 명제로 제시하는데, 죽음을 가시화한 것인 동시에 마음을 졸이는 순간으로 실제적인 효과를 얻어 낸 것이다.

관객 역시 그에 맞춰 숨을 들이마시고 뱉게 되는데, 사실 불안의 원인은 마주하기 어려운 게 사실인데 이토록 불안을 주다 마지막 그 터짐의 순간을 우연하게라도(사실 다 피하려 하기 때문에) 마주한다면 그 충격은 크다. 아니 그 소리에 멍멍하다가도 현실의 구멍이 뚫리는 것 같은 묘한 현상을 마주하게 된다. 이 불안 증세는 사라지고 어떤 쾌감을 느끼게 된다.

 

120911-120912(부토 공연)

죽은 자의 춤 곧 부토는 죽은 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이 펄떡거리는 춤이 되어야 하며 이 죽음은 오직 관객 모두의 죽음에서부터 출현한다. 자신의 죽은 체로써만은 가능하지 않다. 죽은 자의 춤은 죽은 자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때 우리가 죽음을 목격하게 될 때 그래서 이 세계가 결국 산 자의 세계가 아닌 세계가 될 때 곧 죽은 자가 되어 죽은 자와 만나는 세계가 될 때만 가능해진다.

악가 연주가 커지거나 다른 악기로 변하거나 해서 그전과 다른 급선회를 할 때 그에 맞춰 이 죽은 몸 다시 말해 굳은 몸을 겨우 펴내기도 한다. 곧 이 죽은 자는 현장의 규칙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자율적인 몸을 선택하는 것처럼 설사 보인다 해도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내외부의 곧 자기만의 규칙과 안무의 원리가 없어 다른 규칙에 쉬이 동조될 때 얻는 간극은 상당히 크게 마련이다.

두 번째 공연은 장구와 드럼의 판이었다. 거기에 한 남자가 그 에너지를 잔뜩 받으며 몸을 부풀리고 또 뒹굴었다. 세 번째 공연은 꼬챙이에 낀 먹을 것 모형을 든 가부키 복장의 여자와 하얀 색 옷의 아이를 형상화하는 여자 간의 모종의 관계 맺음이었는데 서로는 또 각자의 움직임을 펼치는 가운데 그 같은 묘한 관계가 엮어졌다.

강성국 작가는 일본 무용가 둘을 안고 둘 안의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진동한다. 바깥에서 그 안으로부터 큰 파도가 휩쓸러 가고 또는 폭풍이 사라진 후 몸은 같이 휑하다. 이 몸은 이 거대한 궤적의 사운드, 어느새 몸을 따라 몸에 축적되며 커지던 사운드가 벗어날 때 몸에서는 분명 어떤 간극이 발생하게 된다.

마지막 공연은 모두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멜로디언 불고 입에 물고 몸통을 다리 사이에 끼며 아무렇게나 건반을 두드려 소리를 내거나 야구 타자 폼을 잡고 관객을 때려 소리를 즉석에서 내기도 하는 가운데, 장구의 가속도를 냄을 따라 잡을 수는 없다. 거기에는 휩쓸러 가게 되어 있다. 온통 것들이 뒤섞여도 장구는 메타적으로 그 위데 덧씌워지며 이 상황을 여유 있게 관망한다.

120913
사스키아 에덴스는 뒤로 물러서서 거울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를 반영하던 그는 거울을 직시하고 거기서 떨어져 벗겨져 나옴으로써 끝을 맺는다.
 
성능경 작가는 ‘퍼포먼스라는 바다’에 뛰어들기 위해, 평소 퍼포먼스에서 일상의 퍼포먼스화를 보여주기 위한 주문과 준비 체조는 생략한 채 바로 “생즉사生卽死”의 경계를 가리키는 물로 뛰어들어 시계(시간)를 구원하며, 촉박한 죽음 직전의 시간을 물질의 무게로 바꾸고, 이를 이빨로 들어 빼냄으로써 육체의 감각으로 전환한다.

Philip Brehse는 네 개의 국기를 묶은 것 두개를 돌리며 “나는 항상 늦다 나는 잊었다 나는 늦었다”를 반복하며, 미하엘은 지구본 같은 하나의 세계를 돌리고, 전구를 그 속에 낀다.
 “나는 지불했다 너에게 나는 지불할 수 있다”의 발화에 이어, 옷을 벗어, 두 세계의 극단적 대비를 창출하며, 누드로 무대 벽에 원을 드로잉한다.

김석환 작가는 붉은 피의 내장이 축적된 단지에서 내장을 먹고, 이를 얼굴에 바르고 또 고무줄을 얼굴에 끼기 시작하며 먹는 것과 먹히는 것의 경계를 없앤다.

에릭은 타이어를 던져 자신의 등에 맞고, 자신의 몸에서 튕겨 나간 타이어를 다시 제자리로 위치시켜 던지고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 채 그것을 보지 않은 채 또 맞으며 형벌의 의미와 그것의 은밀한 쾌락의 공모, 그리고 인류사의 고문과 연관한 족적을 어느 정도 상기시킨다.

이혁발 작가는 ‘싱그러운 아침의 식탁보를 빛나게 하는 풍성한 과일’ 등을 발화하며 침이 고이게 만들고, 집을 나서 여행을 떠나 쾌적한 공기를 마시며 상쾌하게 눈을 뜨는 과정으로 심리 치료가 가능함을 역설한다. 예술을 일종의 시뮬레이션 효과 그리고 유사-여행의 형태로 전도시키는 셈이다.

sp38은 야광봉을 들고 어둠과 밝음, 그리고 생명의 은밀한 숨을 드러낸다.

방효성 작가는 풍선을 불어 터뜨린 뒤 그 위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풍선을 터뜨리지 않고, 그 위에 매직으로 그림을 그린다. 오르골 음악으로 공포영화의 신비감을 주며 이 음악 자체도 끊겼다 계속 반복된다는 점에서 한층 그 분위기를 고양한다. 위는 흰색, 아래는 붉은 색으로 칠한 광대로 분해 표정 변화를 없앰으로써 얼굴을 일종의 오브제로 기능하는 게 가능해지는 변신술을 선보인다. 이어 마스크를 쓰고 입을 만들며 끝난다.

오라이언 맥스티드가 무대 위에 올라서 발표를 하다 “어나운스먼트(announcement: 발표)”를 외치고, “탱큐(thank you)”로 박수를 치며 등장하는 반복된 행동을 펼친다. 이는 느리게 변주하기도 하고, 시작이 끝이 되고 어둠에서 빛이 나오고 끝에서 시작이 나오는 등 오프닝과 클로징이 독특하게 반전되며 뒤섞이는 효과를 낳고, 일종의 재현은 착시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다 같이 박수 칠 때는 뭔가 쇼의 분위기가 나면서 관객으로부터 그 쇼의 관중의 정체성이 체현된다.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은, 시작은 엄밀히 지정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쇼가 시작되지 않았고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끝나서 박수치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시작될 것의 또는 끝날 것의 리듬이 어느새 익숙한 듯 몸에 익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춘기 작가는 강이 그려진 스크린에 빨간색과 초록색 선분들을 긋는다. 강을 보여주고 강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회의적 물음들을 던진다. 결과적으로 선분들이 대한민국 영토의 강의 궤적들이 되고 거기서 심장이 영상으로 작게 나타나고, 그 구멍을 뚫어 풍선을 불어 메트로놈의 긴박해지는 소리와 함께 풍선이 터지고 끝난다.
논 그라타는 토치의 폭발적인 의미를 띠며 일종의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연금술로써 현실을 세공한다. 관객에게 뜨겁게 달군 쇠꼬챙이로 문신을 새겨주고, 어떤 낙인, 그리고 신체의 변형을 수행한다.

120914

기계 소음이 무대를 옥죄고 “환영”, “행복의 환영”이라고 쓰이는 풍선을 계속 불어 댄다. 스크린에는 수많은 물품 목록이 엔딩타이틀처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KIRSI PITKANEN의 모습은 하얗게 분칠한 얼굴 광대의 모습에 가깝다.
 
변영환 작가는 십 원짜리 네 개를 붙인 꽃, 그리고 그것들이 뚫고 나간 마네킹을 오브제로 보여준 뒤, 술을 관객에게 따라 주고 돈 통 위에 올라가 소주병 치고 불경 외우며 돈을 징에 떨어뜨린다. 여기에는 “제발 돈아! 돈아! 돌아라!” 자본(돈)의 유연한 순환과 빈부 격차를 줄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수 리 작가는 불빛이 나는 조그만 자전거 모형을 들고 어둠 속에서 이동한다. 검은 봉지를 입고 있고, 바퀴 앞에서 옷을 벗는다. 컨트리 음악에 맞춰 두 개의 인조 바퀴를 팔에 감고 돌리며 끝난다.

위에서부터 인조 손 하나가 내려오고 심장 박동의 기계적 변조가 무대를 뒤덮고 스크린의 물고기가 숲이나 바다 같은 자연에 덧입힌 채 섞여 있는 초현실주의적 그림들을 뒤로 하고 임택준 작가는 흰색 초록색 빨간색 줄들로 얼굴을 싼다. 시계를 껴안고 시계종이 울리며 끝난다.
 
타예 트로스는는 바나나를 하나 먹고 관객에게 던져주며 던지고 잡는 놀이를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발바닥만으로 이뤄진 요란스럽게 소리를 낸다. 까먹은 바나나 껍질을 가져온 바구니에 받아, 그것들을 일렬로 나열한 후 의자를 하나 앞에 두며 끝났다.
심홍재 작가는 화선지를 꼬아 열두 개 놓고 화선지에 물로 “인법지人法地”를 쓰고 말아 교차시켜 놓은 뒤 앞선 화선지 끈으로 꼬아 매듭을 만든다.

강성국 작가는 “잘 가고 있나요(Going well)?” 질문을 던진다. 옷 하나를 걸치고 가고, 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말이 전동 휠체어를 발로 조작하며 감으로써 부각되는 그의 비극성을 감싸며 묘하게 슬픔을 더 극대화한다. 전동휠체어의 경고음이 울리고 그가 내려 휠체어에 끌려온 옷을 힘겹게 입음으로써 끝난다.

트롬본 연주는 둥글게 도는 순환을 가시화하고 있고, 그에 맞춰 부토 무용수들은 뭉쳤다 흩어졌다 하는데 매우 복잡한 춤의 어려움을 표현하려 하지만 그 바탕은 매우 단순한 춤에 불과하다. 거칠고 불규칙적으로 부는 트롬본의 리듬에 따라 몸은 조율당하는 것에 가깝다.
 
유지환 작가는 맥주 한 병씩을 나눠 주고 무대를 돈다. 서로 ‘덤앤더머’처럼 툭툭 뱉는 말들이 웃기다. 상이라는 것과 현장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강타하는, 그래서 더 이상 진지한 작품 감상을 보는 게 아니라 즐기는 하나의 쇼를 보여주는 첫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이틀간의 쇼가 끝나는 시점에서 말이다.

120915(야외)

인트로는 불특정 관객 한 명을 선정해서 카트에 태워서 끌고 가는 ‘당황스런 주인공을 만드는’ KIRSI PITKANEN의 퍼포먼스로 시작됐다.

여러 퍼포머의 협업으로 이뤄진 다음 퍼포먼스는 관객을 원으로 에워싸고 자전거를 타고 그 주변을 돌며 혼란스럽게 관객-원을 조직하고, 관객-원으로 넓게 원 형성하게 하고 이어 그 안에서 샴페인을 돌려서 가리키는 방향의 관객에게 샴페인을 터뜨려서 주며 우연성과 혼란, 즉흥성을 강조했다.

갑자기 퍼포머(제임스 토플)는 쓰러져서 진행자는 얼굴이 빨개져 몸을 주무른다. 구급차가 와서 싣고 간다. 관객은 이것도 하나의 퍼포먼스 진짜인지 아닌지에 대한 혼란 속에서 퍼포먼스를 보게 된다. 나중에 모든 퍼포먼스가 끝나고 제임스 토플이 나타나 꽃을 관객 한 명에게 수여하며 반전된 분위기를 낳는, 죽음이란 실재가 현실/일상/공연에 개입하며 그것의 개념을 전도하는 식의 퍼포먼스였다.

오픈스페이스는 모자를 내밀어 돈을 받고, 차를 데우고, 불을 지피고, 각 국기가 태그된 차를 넣고 우려내어 관객에게 나눠주고 돈을 받는다. 어떤 특별한 리듬이 없어 어떤 일을 하는지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 된다. 예술가의 생존방식과 모두의 축제가 되는 방식을 재현/구현하는 실제적이고도 연극적인 재현 방식의 퍼포먼스였다.

120915

논 그라타는 신문지로 싼 한 아름이 좀 안 되는 무언가를 가져와 관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데 곧 드러나지만 분홍색 긴 풍선 뭉텅이다. 매우 정신이 없다. 풍선을 위로 들어 터뜨려 유희성을 강조한다.

제임스 토플은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등의 물감을 대용하는 여러 차나 색감이 들은 오브제에 자신의 성기를 담그고 이를 하얀 종이에 묻혀 바르는 식으로 채워가며 색색으로 얕게 이뤄진 바퀴를 만들어 나간다. 자신의 성기를 담근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그 위에 오줌을 눟기도 하는 등 먹는 것과 칠할 것, 먹는 것에서 싸는 것까지의 여러 행위의 경계가 액체와 오브제에 섞여 든다.
 
이승택 작가는 불 그림을 그리는데 캔버스에 불이 붙어 불의 궤적이 뜨겁게 캔버스를 달구기도 하며 순간적으로 이미지 형체를 만든다. 이 불을 끄고 다스리는 역동적 행위는 화가라기보다 대장장이를 일순간 떠올리게 하며 결과적으로 그을음만이 남는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얼굴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얼굴을 뭉개며 키스를 한다.

오라이언 막스티드가 캔버스를 돌리자 거울이 나오며 관객을 비추게 된다. 무형의 회화 조각에서 실제적 좌우 반전된 자화상으로 대체되고 작가는 사라진다. 곧 관객을 수행적인 퍼포먼스의 주인공으로 전환시킨다. 작가는 사라지고, 그러한 퍼포먼스를 인식할 관객만이 주체로 남는 것이다.
 
조은성의 검은 옷의 통상의 섹시함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데 작은 자동차 모형에 실을 매달아 그 실을 입에 물고 입 안으로 집어넣어 가며 자동차를 결국 자신의 앞까지 끌어내 낸다. 그 와중에 옷을 하나씩 모두 벗어 젖히는데 자동차를 컵 안의 물감에 담구고 뺀 뒤 자신의 신체에 물감의 궤적을 남기며 자동차를 이동시킨다. 자동차와 신체의 의지적 연결에서 자신의 신체를 자동차가 다니는 커다란 도로 영토로 바꾸며 거대 신체의 판타지적 환유를 도출해 낸다.
 
사스키아 에덴스는 자전거 바퀴 중간에 엠피를 연결해서 흰 종이로 디스크에 스크래치를 내며 음악을 만들어 낸다. 우연적이고 하나의 결을 가졌지만 옛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묘한 생명력이 돌아감을 통해 만들어진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을 패러디/전유한 것인데 사진을 보여주며 그것을 확인시킨다. 일종의 설치작품을 사운드 아트로 다시 탄생시킨 것이다.
 
목에 무거운 돌을 걸고 초록 돌고래 풍선을 왼쪽 발목에 묶어 달고 오른발 한 쪽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며 퍼포먼스 중반 이후부터는 초록색 물감을 입에서 토해 낸다. 음악은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독경의 계속 반복되는 암송이다. 계속 의식의 끈을 놓지 않고 도는 가운데 초록색 물감의 궤적이 무대 바닥에 만들어진다. 육체적 노동을 상정하는 의식적인 퍼포먼스인 셈이다.
 
사토 유키에는 “비행기. 히꼬우끼(ひこうき). 에어플레인(airplane)”을 계속 반복하며 퍼포먼스의 리듬을 만들고 계속 비행기와 관계된 짧은 행동들을 단편적으로 스쳐나가며 한다. 비행기 안 의자에 앉아 음료와 음식을 먹고 비행기가 진동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면서도 계속 세 단어를 하나의 문장 형태로 바꾸는 반복적/유희적 발화 행위는 놓지 않는다. 실제 의자 다리가 하나 부러지는 사태가 발생해서 재미를 줬다.
 
흰 줄로 무대 테두리를 두르고 한영애는 머리카락 한 올을 잘라 넣고 천으로 싸서 들고 다닌다. 이선희 노래가 흐르고 애타게 자신만의 오브제를 안고 돌아다니다 줄을 끊고 무대를 끝낸다.
 
작가는 흰 밀가루 반죽 한 덩어리를 얼굴에 씌우고 사진 찍어 아카이브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한다. 의외로 같이 참여를 부르게 되는 재미를 준다.

윤진섭 작가는 김백기 대표를 특별히 지명해 자장면 빨리 먹기 대회를 벌인다. 빨리 먹되 이기려고만 먹기보다는 노는 재미를 주며 먹는다. 윤진섭의 우세가 점쳐지는 가운데 강남스타일이 배경음악을 장식하며 열띤 응원의 장이 만들어진다. 현재 큰 파급력을 띤 노래인 만큼 실제의 영향력이 퍼포먼스에 더해졌다.
 
관객들을 모두 내려오게 해서 자전거로 그 바깥을 돌고 바퀴를 객석 끝으로 올라가 아래를 향해 던지기도 했다. 또 빽빽한 관객들 틈새를 파고들기도 하며 분주한 환경의 혼란스러움을 만든다.
 
120916(야외)
오라이언의 퍼포먼스 팀은 하얀 화살표 표시, 그리고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피켓을 들고 이동한다. 전체적으로 소용돌이와 그것의 확장 및 수축의 리듬을 만든다.

MYK HENRY는 밀가루 가죽을 가져와 얼굴에 덮어씌우고 사진 찍고 자연스레 사람들 지나가게 해서 사진 찍음으로써 일상의 특이함 잡아내고자 한다. 일종의 아카이브가 되는 형식이다.

“useless(쓸모없는)”, “useful(쓸모 있는)” 두 개로 바뀌는 단어들을 발화하며, 자전거 바퀴를 가져와 터뜨리는 매우 간단한 퍼포먼스, 그의 부풀어 오름의 확장/긴장/오르가즘, 그리고 정점의 카타르시스/허무한 소멸로 이어지는 단속적인 리듬의 감각적 서사 방식이 구현된 퍼포먼스이다.

불 붙이기, 부처상, 풍선을 든 여자들, 바퀴를 굴리고 가며 바깥쪽에서 안으로 혼란 주는 오라이언, 새소리, 징, 디저리두, 호스를 가지고 돌려 소리를 내는 유키에, 차에 올라가기.
이러한 경험은 이곳을 낯선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특정 경험을 같이 하기보다는 낯선 곳이 되는 특정 경험의 공통 경험의 영역이 만들어진다. 굉장히 너른 분포, 집중되지 않는 분산된 공간은 우리 스스로가 이 안에 혼란스럽게 이미 뒤섞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무엇일까, 왜 모이게 되는 것일까. 어떤 하나의 구멍을 찾는 것이라 하겠다. 소실점 없는, 출구 없는 현재에서 균열되고 동시에 하나의 에너지 형태에 수렴되는 것. 이 많은 사람들을 마주해 그 분포는 어떤 하나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

 

글 김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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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9. 02:09 Anth-e-nada(작품 포커스)

2012한국실험예술제 개막식 퍼포먼스

 

 

 

2012한국실험예술제 개막식이 홍대 상상마당 앞에서 열렸다. 먼저 포클레인 퍼포먼스가 열었다. 포클레인의 삽으로 와인이나 막걸리를 관객들에게 따라주는 퍼포먼스였다. 

 

이어 김태윤 작가의 개막 퍼포먼스가 열렸다. 현장에 없는 여러 작가들과 현장의 관객들이 모바일 기기에 쓴 문장이나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퍼포먼스였다. 정창래 의원은 첫 번째로 "술 중에서 제일 맛난 술"을 묻고 이어 "예술"이라고 답하며 포문을 열었다.

 

 

양자주, 장콸, 박현지 이상 세 명의 작가가 한 번에 접속해서 하나의 스크린에 이들의 드로잉이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퍼포먼스는 “바퀴가 있는 곳이 길이고 바퀴가 있는 한 길은 영원하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하나의 현장에 있는 각 사람들의 스마트폰기기들은 실제 소통을 이뤄내는 차원에서 쓰이지 않는데, 하나의 현장에서 그리고 설사 다른 곳에 있더라도, 하나의 소통을 이뤄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작가의 의도였다.

 

'홍대 앞 문화를 진단하다', 토크 퍼포먼스

 

 

오후 3시경 열렸던 2012한국실험예술제 퍼레이드는 큰 규모로 화려했지만, 개막식 분위기는 잔잔했다. 마치 요즘 낮은 덥지만 밤은 쌀쌀한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을 반영한 듯했다.

 

개막식 퍼포먼스에 이어 진행된 토크 퍼포먼스에서 민주통합당 정청래 의원은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을 능가할 만한 곡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며 최근 출장을 다녀온 국가인 폴란드에서 ‘강남스타일’에 맞춰 폴란드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말춤’을 추고 있는 현장을 봤다고 전했다.

 

김백기 한국실험예술정신 대표는 홍대 앞을 28년째 지키고 있는데,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곳이 세계적으로 드물다면서 관객들을 향해 홍대 앞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했다.

 

2009년 '스트리트 H' 매거진을 창간한 장성환 대표는 “삼십년 정도 홍대 앞에 있으면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잡지를 만들고자 했다.”고 전했다.

 

이어 장성환 대표는 ‘강남스타일’이 인기를 얻는 데 대해 “강남보다 홍대가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데, 재미있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동네가 재미있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전했다. 실험예술제를 통해서 더욱 재미있는 동네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사회를 맡은 한젬마 작가는 홍대 작업실을 튼 지가 11년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홍대에 오랫동안 계셨던 분들이 “옛날이 그리워.”라는 말씀을 많이 하는 이유를 그런 말이 왜 나오는지에 대한 질문을 패널들에게 던졌다.

 

김백기 대표는 홍대 앞 문화는 90년대 초중반에 만들어진 문화로 당시에는 아티스트들이 만들어 나갔는데 2000년대 들어 클럽이 상업적인 공간으로 변함에 따라 예술가들이 홍대 앞을 많이 떠나게 되었다고 전했다.

 

올해까지 스트리트 H를 통해 동네 소식을 모두 볼 수 있는 포털 사이트를 만들고자 한다고 전했다. 포털사이트들이 통사 오륙개월에 한번 지도를 업데이트하지만 스트리트 H의 경우 한 달에 한 번씩 사이트를 업데이트한다고 전했다.

 

정창래 의원은 홍대 앞을 세계 제일의 예술의 거리의 메카로 만들고 임대료 상승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가들의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제공하고자 전했다. 첫 번째 국내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가 문화창작 발전소(문화 복합 단지)로 발전해 나가고자 하는데, 현재 발전소가 이사할 공간을 찾지 못해 중단된 상태라고 전했다.

 

김백기 대표는 베를린을 갔다 오면서 예술가들 자생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생각했는데, 그 하나의 대안이 ‘버스킹 문화’였다고 전했다 카페 등에서도 예술가들이 공연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며 많이 감명받았다고 전했다

 

정창래 의원은 홍대에는 다른 것들이 많다며 “사람, 색깔, 아이디어, 예술가들의 자유, 가능성, 희망”도 많은 반면, 부족한 것들도 많은데, “예술인들에 대한 배려, 활동 공간, 현장, 국가의 보호”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윤진섭 평론가는 어느 도시든 랜드 마크가 있는데, "홍대 앞"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다며 당인리발전소를 박물관으로 만들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라이브클럽 빵’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등 대표는 “대통령을 잘 뽑아줬으면 한다. 이상한 사람 뽑으면 우리 돈이 그냥 땅바닥에 들어간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예술이든 시민이든 상식을 갖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실험적 음악 공연들

 

 

토크 콘서트가 끝나고 막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자 갑자기 외국인들이 무대 앞에 난입해 춤을 췄고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판이 만들어졌다.

 

김우주천왕의 ‘으르렁~ 쾅!’하는 사운드와 함께, 전자 비트와 리듬을 만들어 내는 패드 연주가 뒤따르는 독특한 연주가 무대에 올랐다. 일종의 일렉트로닉 음악의 경쾌함과 클럽 음악의 춤추기 좋은 비트가 만들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그것을 감싸는 매우 격렬한 끓어오름의 사운드와 노이즈였다.

 

긴 머리에 마스크를 쓴 작가의 이미지가 그에 잘 맞아떨어졌다. 교통 소음 등이 중간에 뒤섞여 들기도 했고, 몇몇 피처링이 배경음악으로 섞여들기도 했다.

 

 

‘내귀에 도청장치’는 독특한 분장에 뇌쇄적인 보컬 이혁을 비롯하여 몽환적이면서도 탄력적인 리듬의 폭발적 연쇄 과정을 밟아 나가며,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무대 앞쪽의 펜스를 치우자 관객들이 다 몰려가서 환호를 외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멈춰 그들의 무대와 함께 했다. 앙코르를 두 곡이나 했고, 세 번째 앙코르가 나올 때 사회자의 멘트로 끝이 났다.

 

2012 한국실험예술제의 개막식은 인터액티브적 라이브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홍대 앞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해 보는 한편, 대중의 힘을 얻는 음악 공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공감과 열광을 함께 얻었다.

 

<ARTROAD PROJECT, 바퀴>라는 주제로 열리는 2012 한국실험예술제는 호주·핀란드·아일랜드·스웨덴·미국·영국·스페인·덴마크·폴란드·에스토니아·일본·스위스·캐나다·독일·멕시코·프랑스·한국 등 17개국의 아티스트들이 참가하며, 이후 16일까지 홍대 앞에서 ‘아트로드’를 만들어 나간다. 9월 23일까지 제주도·대전·부산·익산·남해·하동 등 전국적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축제 장소를 확대하여 아트로드를 확장해 나가게 된다.


 

[축제 개요]
  - 제목 - 2012한국실험예술제 - 아트로드 프로젝트, 바퀴
  - 일시 : 2012년 9월 8일(토)~16일(일)
  - 장소 : 홍대 앞 일대 거리, 포스트극장, 요기가 표현갤러리, 서교예술실험센터, 횡단보도, 버스, 지하철, 옥상 등
  - 주제 : 아트로드 프로젝트, 바퀴
  - 주최 : 한국실험예술정신(KoPAS)
  - 주관 : 한국실험예술제 운영위원회, ANU communication
  - 참여 국가 : 호주, 핀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미국, 영국, 스페인, 에스토니아, 일본,
스위스, 캐나다, 독일, 멕시코, 프랑스, 한국, 중국 등 (17개 국)

협력축제
  - 에스토니아&라트비아 : DIVERSEUNIVERSE
  - 독일 : International Printer and Performance Festival
  - 한국 : 익산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 부산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 남해 바다 미술제, 제주 탐라대전, 광주 국제 퍼포먼스 아트 페스티벌

  -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서울시, 마포구, 독일대사관, 김달진미술연구소, 서교예술실험센터, 서울메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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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6:32 Anth-e-nada(작품 포커스)



Steve Vanoni는 관객들을 무대로 세워 적극적인 참여자로 만든다. 관객은 객석에 위치하지 못 하고 프로시니엄 아치에 올라가며 무대 중앙에 관객에서 다국적 관객들을 한 명씩 불러와서 의자에 서게 하고 각각 신은 신발들에 대한 멘트를 더하고, 걷기 챔피언을 뽑는다. 면 대 면 커뮤니케이션을 만드는 시간이다.

이어 무대 바깥으로 관객들을 소몰이 하며 통에 바지를 내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다 일어나 바지를 추어올리고 관객들을 향해 통에 들은 것을 흔들어 쏟아 붓자 관객들은 기겁하고 식물의 잎들이 쏟아지는 트릭을 완성한다.

무대로 들어와 관객들을 원으로 세우고 샴페인을 눕혀 바닥에 돌려 샴페인의 주둥이가 가리키는 방향의 사람에게 샴페인을 수여한다. 스티브 바노니는 관객을 게임의 주체로 무대에 섞는 동시에 어떤 아픔이나 고통, 내면의 깊숙한 고민 따위 없는 즐거운 축제의 현장을 수여한다.

Mrat Munn Htwann은 “물어(bite)”라는 단어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객석에 침입해 관객에게 자신을 물고 자신은 관객의 신체를 무는 행위를 이어 나간다. 세기를 크게 해 자국을 남기는 목적이 있는 듯 보이고, 테이블 위에 달걀들을 놓고 머리로 모두 깨뜨린 후 무스 성분의 흰 파우더 같은 것을 그 위에 뿌린다. 마치 다지고 달걀을 묻히고 튀김옷을 입혀 하나의 요리로 자신을 비유하는 듯하다.


뼈다귀가 무대 위에서 투여되고 한 빙은 그것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고 혀로 칼을 핥는다. 뼈다귀로 온 몸에 문지른다. 이는 현시되지 못 하고 어떤 지나간 시간 차원에 머물러 있다. 나뭇가지들로 울타리를 만들고 향을 피운 공간에 뼈다귀들을 한 움큼 안고 들어가 있다. 뼈다귀는 죽은 자의 영이고 이를 의식을 지운 채 죽음의 의식에서 위무하는 것이다. 곧 관객은 온전히 느낄 수 없는데 약간의 스산함만을 느낄 뿐이다.


오픈 스페이스 베를린은 가톨릭의 교황의 옷을 입고 권위를 체현한다. 이는 시대를 비껴난 것을 의도적으로 제시한다. 향 그릇에 향을 피우고 그릇을 두드린다. 의식을 집중시키는 의식적 행위는 소리가 없고 의식을 침잠시킨다. 반복적인 화음 단위의 종교적인 노래를 이어 같이 부르며 관객도 같이 동참하게 된다.

촛불을 나누고 샴페인을 터뜨린 후 샴페인으로 한 명 씩 세족식을 행한다.

교황의 권위를 밑으로부터 출현시키며 모성의 편안함과 굽어 살피는 시선을 전체로 옮긴다. 곧 가톨릭 제의식을 전유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시공간을 삶에 수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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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6:28 Anth-e-nada(작품 포커스)



우주비행사복, 색색의 화려한 아프리카 원주민 차림, 스쿠버다이빙하는 사람 세 사람(경계없는예술센터)이 하나의 조합을 이뤄 홍대 거리를 그저 걷는다. 달에 착륙한 우주인이 한 발 한 발을 경이롭게 걷듯 걷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천천히 어리둥절하게 사람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현실 적응에 대한 감각의 과잉에 잠깐의 시선을 뺏기게 된다. 도시로 떠난 여행은 도시 속 여행의 순간을 안겨주는 셈이다.


강성국 작가의 떨판으로서 몸은 어떤 무용수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경로 속에 자신의 춤의 열정을 체현해 낸다. 몸의 튕김, 솟구치듯 다시 위태롭게 균형을 맞추는 보폭, 손과 발의 힘이 쏠려 구부러져 있는 모습까지 온 몸에 힘이 자리해 있음을 느낀다.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노이즈 사운드가 스피커를 부수고 나올 것 같이 쿵쾅 대고 그는 수조 속으로 들어가 물을 쳐대며 어떤 자신의 삶에 깃든 분노 따위를 쏟아낸다.


슈양 작가는 구슬 같은 아주 작은 오브제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행인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들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이는 말을 건네고 동의를 구한 후에 가능해지며 동의를 구하지 못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가기도 한다.

퍼포먼스 아티스트로서 특별한 면모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심하게 또는 귀찮은 대상을 만났다는 듯 별 의식 없이 그를 지나친다.

현대인의 소통이 이뤄지기 어려운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들을 자신의 사진기에 담는 일종의 한 순간의 추억, 자신에게는 자신이 아닌 자신과 함께 한 사람들과의 기억, 사람들은 잠깐의 한 순간의 경험으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는 사적인 기억들이고 공적인 기억이 아니다. 특별히 하나의 경험이나 형태로 간추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느끼는 기억이 다르고, 구슬은 아티스트가 주는 하나의 선물이자 소통의 미디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작가에게 내밀한 경험을 불어넣고 퍼포먼스의 주체를 역전케 하는 것이다.


스핑터스 팀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며 팝과 뮤지컬 음악적으로 편곡된 곡들에 맞춰 움직인다. 특별한 움직임이나 따로 부르는 노래는 없었다. 흰 캔버스에 미끄러져 내려가는 유연한 붓질이 시원함을 더한다.


일본 전통음악에 맞춰 아이를 업고 무시마루가 춤춘다. 죽은 신체가 아닌 시간을 되돌린 어느 한 시점에서.

죽은 신체의 현시도 아니고 다만 음악에 도취, 관객을 상정치 않는 그럼으로써 아우라를 형성하는 표현주의적 과도함에 빠져 있다.

곧 스스로 다른 세계에 있다.
엄밀히 부토의 양식도 아닌 부토 흰 색 칠을 한 기괴한 듯 움직이는 그만의 독자적 움직임이다.


병들이 놓인 흰 펠트 천 위에 고깃덩어리를 흰 줄로 묶어 끌고 들어온다. 그것을 양옆에 놓고 병들을 하나씩 천 위에 던져 깨뜨린다. 모두 깨뜨리고 손에는 피가 새어 나오고 실재적 감각으로 전이되어 온다.

중간에 손으로 자리를 만들며 생채기가 나고 객석에서 한 명을 끌고 와 안고 하나의 곡이 끝날 동안 있다. 야성적인 면모, 불완전한 감정과 폭력은 떨리며 따스한 스킨십이 오가는 가운데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폭력과 깨진 병은 음악 포옹 이성 간의 사랑과 묘하게 병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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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6:12 Anth-e-nada(작품 포커스)

 

Boyet De Mesa는 천을 가장자리부터 중심을 향해 가지런하게 잘라간다. 이것들을 관객들에게 마스크로 씌우고 관객석 위로 위치해 탄압으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을 부른다. 또 그 부당한 압제에 항거한다.


제임스 토플은 두 팀으로 갈라 여러 게임들로 상황을 빠르게 전환하며 속도의 리듬을 탄다. 빠른 템포는 관객들에게 생각할 시간보다 참여에 대한 충동과 판단을 종용한다. 곰 내지 호랑이 되기의 토템 의식의 맥락이 전제되어 있고, 필연적으로 호랑이와 곰이 되어 인간되기를 지향하며 게임의 승리를 위한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하고, 영상에 나오는 문맥을 체화하고 인지해야 한다.

day로 측정되는 며칠간의 되기 과정은 왜 곰이 왜 호랑이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 것과 엉덩이만을 계속 카메라로 잡는 유희적인 화면을 만들기도 하고, 직접 그리기나 노래 부르기 등의 퍼포머가 되어야 하는 시간들도 있다.

 「I Love You」를 "감사합니다"의 노랫말로만 이어진 노래로 재편하거나 그저 길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토플의 모습 뒤에 스쳐가는 행인들의 모습이 매우 불완전하고 안정되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 등 한국의 상황을 외국인의 관점에서 한국에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에 의한, 또 다른 이질적인 우리에 대한 시선이 감각된다.

하지만 영어로 진행되는 내러티브의 과정이 한국어로 번역되지만, 제대로 그 언어의 문맥이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곧 한국적 맥락을 가져가고자 하지만 질문과 시선이 우리에게 친숙치 않은 여전히 낯선 것과 같다.


슈양은 중국‧미국‧한국‧러시아 등의 우리말 발음을 관객에게 물어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 낸 후 립스틱으로 종이에 받아 적고, 립스틱을 한 손에 고르게 펴 바른 후에 관객 몇몇에게 악수를 청하고 "DMZ"라고 적은 종이에 손을 처대서 글자가 번진 종이를 들고 관객에게 보여준다. DMZ에서 확장된 냉전 체제, 여러 제국 세력들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것들이 융해된, 그래서 그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수행의 몸짓을 투여한다.


오픈 스페이스 베를린은 “naked kitchen”이라 적은 커다란 바람을 채운 커다란 비닐 구조물에 들어가 요리를 하는 것을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으로 생중계한다.

요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뒷받침해 주고 지배하는 기타의 노이즈 사운드가 의식의 집중을 방해하고, 축제의 순간으로 일상을 열어젖힌다. 다만 요리를 하고 이것이 라이브라는 사실에 비추어, 또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리의 현장을 만든다는 점에서 일상의 리듬을 재편하며 퍼포먼스를 성립시킨다. 사운드는 어떤 것도 지정해주지 않고, 불협화음만을 창출할 뿐인데 요리의 리듬을 하나도 살려주지 못 한다. 마치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가 아닌 비닐 안의 불투명한 존재들의 자취를 지정해 주듯이.

이러한 새로운 정보가 유입되지 않고 냄새를 통한 음식이 되고 있다는 것만의 인식은 매우 지루하면서도 약간의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긴 시간의 지속 반복된 리듬 하에 요리한다는 단순한 전제가 주는 자장에서 우리는 퍼포먼스를 본다고 느끼기보다 그 안에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감각은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특히 이 퍼포먼스는 무대 밖에서 파티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맥락이 무대 안으로 들어오며 삭제된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무대 바깥에서 잠자코 그들을 보는 관객의 입장은 꽤 괴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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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6:07 Anth-e-nada(작품 포커스)

메트로놈 박자는 움직임의 박자를 지정하는 기본 전제로 작동된다. 둘은 발레 바를 두고 마치 거울처럼 같은 움직임을 형성한다. 움직임은 몇 박으로 이뤄져 있고 동시에 몇 박자로 분절되어 있는 셈이다.

박자로 나뉜 움직임은 같은 속도로 지속되고 달라지는 몇 가지 동작은 그 시작점을 보지 않으면서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시작과 과정을 모두 같은 속도로 똑같이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기계적인 움직임은 일종의 메트로놈이 지정하는 박자를 완전히 움직임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이고, 메트로놈 박자에 귀속되면서도 그 똑같은 지루함의 박자, 아니 단지 하나의 기본 리듬으로 깔리고 있는 박자를 움직임의 단위로 재편해서 화음적인 신체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곧 매우 음악적인 신체, 전시를 통하지만 사운드가 중첩된 움직이는 신체-오브제로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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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6:05 Anth-e-nada(작품 포커스)



Julie Jaffrennou는 움직이지 않는 신체, 그렇지만 신체 그 자체를 매우 잘 조명한다.

떨리는 몸, 의지에 의해 구속하지만, 실은 구속될 수 없는 신체의 자율성을 드러낸다.

흰색의 녹는 옷은 그녀 위에서 떨어지는 채에 걸러지는 물방울들로 인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녹아내려 신체가 조금 더 드러나게 된다. 설치적 신체를 구현하지만 역설적으로 신체의 유동을 표현하며 시간은 옷의 녹아내림으로 드러나고, 신체에 집적되는 피로도로 명시화된다.


박일화는 명상을 동반한 다도의 느리고 은근한 시간을 몸으로 구현해내고, 또한 선녀의 정화되고 순수한 기원으로서 신체를 아우라로 드러내고, 결과적으로 차와 명상, 정화를 통한 치유 의식을 관객에게 투여한다. 관객은 음악에 맞춰 춤추고 손잡고 원으로 돌아 뛰며 일상과 일상에서의 무거운 짐들을 훌훌 털어버리게 된다.


오라이언은 일상을 퍼포먼스 문맥으로 변화시킨다. 한 시간 동안 소몰이를 하며 관객들을 이동시켜 한 명씩 각종 홍대의 가게들에 들어가 점원 등으로 일하게 하고, 한 시간 후에 출발 장소에서 다시 만나는 원칙을 세운다.

관객들은 퍼포먼스의 시간 동안 일상의 시간과 중첩된 일상과 예술의 시간의 경계를 오가는 묘한 시간의 영역에 위치하며 새로운 시간의 감각, 일상과 공간(홍대)에 대한 시선의 재편을 경험할 수 있다. 다만 코드화된 일상에 틈입하는 장치를 간단히 투여함으로써 일상의 감각을 재편하고 퍼포먼스의 문맥을 가져가는 것이다.


물고기를 머리에 이고 가며 에스토니아 두 작가는 시를 읊고 간다. 그녀가 먹는 물고기에 자신을 투여하는 일종의 초월론적 관계의 문맥을 만든다.

그녀의 뱃속에 들어간 고기가 나라면 난 그녀와 직접적인 육체를 맞닿게 된다. 그 외에도 동물을 섭취하는 인류의 오랜 생존 방식에 대한 문맥도 깔려 있다. 죽은 생선을 머리에 쓰고 감으로써 생선 되기의 토템 의식적 성격이 내비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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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5:57 Anth-e-nada(작품 포커스)


중계식으로 퍼포먼스를 진행할 때 그 시작은 이쪽 현장에서 시작된다. 곧 여기가 그쪽에서 중계되거나 표상되지 아니할 때 그는 퍼포먼스를 시작할 수 없다. 김백기 예술감독이 ‘여기가 다 준비가 됐다, 이제 시작해도 된다.’고 할 때 퍼포먼스는 이미 거기에서서의 작가 '성백'의 시작이 아닌, 여기서의 시선과 현장에 있는 작가의 모습을 통해 시작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사람 두상의 정수리 부근 구멍이 뚫린 조각에는 식물이 나 있고, 여기에 흙을 뿌리며 또 그 흙을 입에 넣으며 그리고 카메라 앞 놓은 비닐에 흙을 뱉으며 끝난다.

기타 소리가 서정적으로 울리는 가운데 환경에 자신의 의식을 불어넣고 현실을 초월하는 듯한 몽롱한 화면에서 작가는 존재한다.

스크린은 현실을 매우 다르게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으로, 그래서 사실상 매개 과정의 간극을 통해 그 존재함이 묘하게 현실을 중개한다.

▲ 심철종

심철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자신의 실존적 의식의 자장에 반복해서 집어넣는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는 말은 계속 튀어나와 현재의 생각을 앞지른다. 이것은 유예되고 다시 반복되게 되어 있다. 나는 살아있지만 지금은 살아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이런 긴박한 의식적 흐름의 구성은 그를 지우고 목소리만 남아 내면의 갈급함에 손을 내민다.

메트로놈보다 빠른 박자의 언어는 의미와 이미지를 생성하는 이야기와 현실의 구조를 만들지 않고, 생각과 의식에 앞서는 언어, 무의식의 언어 조각들이 강박적으로 그를 사로잡고 있다. 언어는 결코 생각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이것이 거의 말해지는 대로 말하는 것이라면.

임택준은 붉은 줄을 무대 양 옆으로 크게 달아 놓고 그것을 당겨 팽팽한 장력에 자신의 실존적 몸부림을 더한다. 구도자적 여정과 같은, 또 내면의 명상적인 침잠의 사유를 더하며 순수한 이념의 언어의 힘을 빌려 현실을 나아간다. 이는 정신적 수행에 가깝고, 나오는 노래 역시 목소리 자체에 이념과 삶을 일치시키는 진정성의 노래다. 지금은 올 수 없는 이전 시대의 목소리와 노래.

▲ 유지환

유지환은 매우 즐거운, 어떤 이념도 표상도 재현도 없는 놀이의 규칙을 가진 즉석의 즐거움을 무대에 전이시킨다.

관객들을 9명 선정해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마스크를 모두 쓰게 해서 수치심을 관객으로부터 없애게 하는 일종의 작가 스스로의 방편으로 제시된 규칙을 따르게 된 이들에게, 총 소리가 나고 이에 맞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죽는 또 하나의 규칙이 주어지고, 관객들은 아니 퍼포머는 한꺼번에 죽는 게 아니라 수차례 나뉜 그 죽음의 연기(演技)를 통한 연기(延期)의 순간을 수행한다. 이것이 다다.

▲ 조은성

조은성은 삶을 퍼포먼스 무대에 끌어온다. 장뇌삼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데, 언니가 자궁경부암이 걸렸다는 진단을 듣고 난 이후, 굳이 삶을 퍼포먼스와 분리하거나 그녀가 당면한 문제를 벗어나거나 하지 않고 그녀는 이것을 무대 위에서 먹으며 무대에 펼쳐 놓는다. 일부러 검은 화면에 검은 글씨로 타자를 치고 나중에 커서로 그것을 긁어 한 문장으로 표현함은 대화를 하기보다 잠잠한 자신의 내면을 조용하게 건네는 측면에서 유효하다.

▲ 문재선

문재선은 하프처럼 생긴 조명 장치가 달린 구조물을 가져와 무대에 놓고 물을 쟁반에 붓고 바닥에 몸을 밀착하며 물을 숨으로 천천히 깊숙이 빨아들이고, 바닥에 입을 대고 천천히 숨을 쉬어 물을 바닥에 새어나오게 한다. 이는 물을 명백한 크기로 그 줄어듦과 옮겨짐을 감각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물과 바닥과 내지는 쟁반과 신체가 숨을 통해 접합되어 있고 몇 번의 옮기는 과정의 물리적인 결과물 안에 여러 숨과 행위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하는 것에 가깝다.

더군다나 바닥에 흩뿌려진 물을 자신이 처음 벗었던 바지로 훔치고 무대를 물러난다. 어떤 결과물도 실은 남기지 않는 것이다. 다만 행위의 과정만, 신체의 집중성의 표현에 대한 미감과 사유로서 신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유도화'는 ‘현장성 감각 인상을 채집’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녀는 마치 관객과 유리된 듯 작은 텐트 같은 곳에서 시야를 넓게 확보하지 않고 관객과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고 있는데, 한편 이는 명백하게 무대의 관객에게서 유래하는 시선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사유가 조각되는 과정을 대화의 언어가 아닌 독백과 글의 언어로 표현한다.

이는 작가의 사상의 지문이 채취되는 순간이기도 하며 자신은 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타자의 수행은 있지만, 그녀의 생각만이 몇 초의 간극, 곧 몇 개의 단어들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는 우리의 인지 과정의 경로에 비추어 그것이 조금 뒤늦게 파악되는 과정 속에 의미의 형성 과정의 간극을 겪게 만든다.

동시에 이 사유가 오가는 과정에서 물리적인 결과물을 형성하지 않는 것의 현실을 메타적으로 언설하며 그녀는 아무 것도 만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적극적으로 관객이 채워 넣는 퍼포머로서 위치를 수행함을 이야기한다.

관객을 망원경으로 살피고 그 인상을 적는, 곧 시선의 문제, 그리고 무엇이 직접적으로 수행을 하는 주체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녀는 오히려 관객을 관찰하고 관객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대상일 수 있는 주체, 주체일 수 있는 대상, 퍼포머와 관객의 위치를 역전하면서도 그 경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흥미롭다.

▲ 김은미

김은미는 주차장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비닐 위에 자신의 대변을 놓고 거기를 엉덩이로 깔고 비빈 후 손에 묻혀 무섭지 않다고 쓴다. 자신의 뱃속에 있었지만 사실 지저분하게 인식하는 일종의 모순과도 같은 우리 사유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이다.

▲ 방효성

방효성은 앉아서 손을 사용하지 않고 상추를 입으로 씹고 먹은 뒤 어기적거리며 먹은 뒤 그것을 옷에 닦는다. 신체를 통과한 오브제, 그리고 신체-오브제적인 설치로 자신을 드러낸다.

▲ 변영환

변영환은 돈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간단한 퀴즈를 통해 인식시킨 후 동전이 담긴 통을 몇 개 관객에게 나눠주고 큰 투명한 원통에 그것들을 담게 한 후 가득 찬 투명 원통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얹고, 만 원짜리 음악과 함께 지폐를 단 자전거를 탄 인형이 움직이는 사이에 지휘를 하고 로댕을 끈으로 묶어 들어 올리고, 돈이 든 원통을 쓰러뜨린다. 돈에서 실존하는 존재의 구출이자 목에 걸린 줄로 인한 자살을 시키는 것이다.

10440개의 비, 비를 숫자로 셈으로써 오히려 더 추상적인 비를 체감케 한다. 그리고 셀 수 없는 시간이 거기에 새겨진다. 이것은 시다. 작가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시는 마치 설화와 같이 작가와 함께 사라진다. 어딘가의 기억으로부터 유래되는 시.

▲ 이혁발

이혁발 작가는 몸을 장애인처럼 놀리며 일상의 몸을 포기하고 새롭게 신체를 조각한다. 마치 공룡처럼 손목을 꺾어 내밀고 혀를 내밀어 또 다른 변이를 이룬다. 이는 뇌성마비 작가 강성국의 몸을 자신이 체현한 것으로 재현이면서 실은 타자에 대한 초월론적 소통의 길을 구현코자 하는 것이다.

▲ 이승택

이승택 선생은 거의 생애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에이즈 퍼포먼스’, AIDS 문구를 쓴 휘장을 팔에 두르고, 세밀하게 조각된 성기 조각을 막걸리를 부은 통에 끼워 관객들에게 종이컵에 따라 준다.

에이즈의 심각성을 유희적인 재미와 일 대 일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변용시키는 가운데 하나의 퍼포먼스가 끝나고, 여자가 뒤로 돈 나신의 커다란 설치물을 들고 위치를 바꾸며 그 중간에서 혀를 내미는 익살을 표한다.


나이를 뛰어넘은 매우 재미있는 장난이자 설치물과 신체 간 관계를 역동적인 그림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지막에 설치구조물 앞에 나와 기념사진을 찍어 오늘 자리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자리함으로써 이날 실행된 퍼포먼스 시간들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경험의 순간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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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7. 15:35 Anth-e-nada(작품 포커스)


▲ 홍오봉

“new world disorder”, 스판덱스 천을 팽팽하게 관객들에게 당기게 해서 그 위에 타고 몸을 뒹군다. 예술은 아슬아슬한 것이라 말하며 찢어지기 전의 긴장을 예술로 비유한다. 또한 퍼포먼스가 이뤄질 수 있는 동력을 어떤 참여의 측면에서 찾고 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퍼포먼스 진행 중의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그러한 소통을 통한 퍼포먼스 구현을 위한 말 걸기 전략인 셈이다.

결국 무게를 못 이기고 찢어지게 됨으로써 퍼포먼스는 예측 불가능한 현재와의 단절, 예술이 될 수 없는 순간을 예술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끝을 맺는다. 물론 이러한 비예측성의 시간은 시간이 더 남아 그가 자잘한 이야기를 덧댄다.

김춘기 작가는 자신이 직접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 무대 커튼에 붙인 종이에 프로젝터를 쏘아 우리나라 지도를 비추고 큰 강의 흐름이 선으로 그려지며 4대강 공사를 강행하는 정부 정책에 반기를 직접적으로 드는 내레이션을 덧댄다. 그리고 풍선을 지도의 구멍 사이로 불어 터뜨리며 4대강 공사의 위험을 감각적인 자극의 순간과 함께 예고하듯 드러낸다.

▲ 흑표범

흑표범은 커다란 장막 스크린에 덮이고, 영상은 그녀 신체를 통과하게 된다. 미디어와 접합되는 신체는 영상으로 인해 사라지면서 미디어가 입히는 감각이 스크린-신체로 체현되게 된다.

개의 걸음을 매우 가까이 비추거나 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빠른 영상의 전환이 예측 불가능의 정보의 집적과 변환, 그리고 유사 계열의 표면의 계열로만 드러나는 이미지가 존재로서 완전한 형태를 그려내지 못 하며 의식들을 파편화시킨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실재적인 감각 사이의 양자 간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왕치

왕치는 사탕과 초콜릿에 관한 자신의 내밀한 추억들을 이야기로 푼다. 작가가 부여하는 초콜릿에 대한 심상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지만, 어떤 한 시대를 표상하는 단편이 거기서 발견될 수도 있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걸고 이야기만으로 추상적이고 불확정적인 저마다의 심상을 하나의 각기 다른 무대로 치환시키는 심상의 작용이 퍼포먼스의 주요한 이야기다.

신진식은 자신이 직접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피하고,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성들을 비슷한 계열의 옷을 입게 해서 무대 위 오브제-미디어로 투여한다. 한 사람씩 나와 약간의 짜증 섞인 표정을 무대에 드리우며 연극적인 상황의 연기를 덧대는데, 이는 시간이 간다는 것만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어떠한 이미지도 주지 않기 때문에 빈 정보의 공간에서 관객들은 저마다의 심상, 사회적인 문맥을 무대로 끌고 오며 무기력하게 의식을 놓고 눕는 여성들의 잠깐의 표정이 주는 의미를 판단할 수밖에는 없다.

▲ 안정

안정은 머리에 외계인 같은 송신 기능의 큰 귀를 부착하고, “똑~딱”, 두 음절을 좌우로 고개를 왔다 갔다 하며 관객에게 보내고, 이는 그 크기를 빨리하는 템포의 조절로 또 너무나 쉬운 하나의 리듬 체계로서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유희적 재미를 덧대 퍼포먼스를 지속시킨다.

▲ 김석환

김석환은 지구본을 우산대에 끼워 들고 등장, 지구대를 빼서 닦고 갈아 마치 지구를 정화하고 새롭게 영토를 구축하는 과정을 가져간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문맥을 환경 또는 전쟁과 같은 것, 또는 인간 그 위에서 지구를 하나이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이론과 같은 시선을 투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무혜

무혜는 미디어 잡지 이미지들을 속옷과 같이 붙여 요란한 장식을 한 몸을 무대에 전시하며 무대 위로 올라가 그 종이들을 하나씩 떼어 씹으며 관객을 마주본다.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미디어의 홍수에 대한 메시지는 날카로운 시선의 순간으로 획득되지만, 그 자체로 미디어-신체로 기능하며 그러한 삶의 터전을 확장시켜 드러내고 있다.

▲ 박주영

푸른 돌고래를 들고 들어와 무대 위 바닥에 걸어두고 그릇에 담은 레몬들을 자신의 몸에 쏟아 붓는다. 이어 바이올린을 키며 레몬을 자신의 머리에 짜낸다. 자신의 내면을 무대로 확장하는 것이자 자기 치유적 의미들이 들어간다. 레몬은 일종의 신체적 정화의식, 바이올린은 내면에 대한 정화의식에 조금 더 가까운 듯싶다.

▲ 안치인

누워서 인간 컴퍼스가 되어서 흰색 분필로 원주 일부분으로서 네 부분을 완성하고 구역을 상정하며 투명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 두 팔을 위로 벌려 잡고 좌우로 왔다 갔다 허리를 트는 체조를 돌아가며 한다. 투명 수조에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들을 넣고, 수조 속으로 담근 호수로 바람을 집어넣어 기포를 낳고 물을 머금은 채 마이크에 대고 기포 소리를 낸다. 풍경을 부채로 불어 소리를 낸다.

사운드-신체 내지 사운드-오브제, 사운드-오브제-신체의 통합적 미디어를 이룬다. 대상에 영향을 주는 메트로놈 박자와 같이 기계적으로 계산된 행위들이 인접하며 분절적으로 신들을 이어감으로써 사운드 환경에 놓이는 신체와의 영향 관계를 조망하게 된다.

▲ 류환

류환은 붉은 빛 조명에서 얼굴을 보던 신문지로 감싸고 묶은 뒤 흰 풍선을 불어 젖힌다. 음악은 혼란스러운 리듬을 직조하고 그러한 거친 에너지에서 퍼포먼스는 동력을 함께 한다. 풍선을 불어 터뜨리며 감각의 자극을 선사한다.

▲ 성능경

성능경은 ‘자지 랜턴’을 관객들에게 비추고 나서 "압(up)" 네 번 정도 소리를 키우며 내고, 조명도 그에 따라 점층적으로 밝아진다. 숨 쉬는 걸 의식적으로 하면 굉장히 불편해진다고 하고 퍼포먼스로 숨을 쉬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낸다. "다운(down)"을 네 번 정도 외치며 조명도 점층적으로 줄어든다.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숨을 쉴까요?', 질문하고 부자들이 숨을 쉬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솜방망이를 꺼내들고 'stick of money'라고 칭하며 ‘나는 당신에게 주겠다. 지금부터 돈 방망이 받아라!’하며 관객석에 침투하여 무차별한 폭력을 선사한다. 부자들이 어떻게 숨 쉬는지 보여주기보다 돈을 가져다주는 주술적 대상의 힘을 전제하고, 폭력을 의식儀式으로 실은 장난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 심홍재

심홍재는 종을 치며 등장하여 노란 천을 깐 바닥에서, 노란 천 주변에 긴 나무 막대 오브제를 열 두 구역으로 나누어 분배하고, 십이지인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쓴다. 바닥에 사람은 땅을 본받는다는 “인법지(人法地)”를 쓰고, 베개를 설치하고 종을 치며 물러난다. 설치 구조물을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제의식적 측면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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