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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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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29. 02:53 Anth-e-nada(작품 포커스)

▲ Orion Maxted

'남북통일에 관한 국민투표', 고양이와 개 각각에게 개와 고양이라고 인식시키고 서로는 서로의 적이라고 역시 인식시킨다. 이는 한 문장씩 쓰인 하얀색 하드 보드지를 앞에 들이미는 것으로 이뤄지고, 실상 인식시켰다는 전제 하나의 규칙만을 상정시킬 뿐 고양이와 개에게 지시적인 언어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 한다.

개와 고양이는 검은 막으로 단절되어 있다. 다만 이는 남북 역할로 가정된 전제가 있는 가운데 인위적으로 경계를 설정해 놓은 것으로, 그 경계를 차단했을 때는 의자 위에 오른 고양이와 밑에서 짖어대는 개의 긴장 영역이 발생하게 된다.

애초에 개와 고양이와 첫 대면을 시킨 것부터가 둘의 싸움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것일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곧 인위적인 경계가 보호막 기능을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에도, 막이 올라가는 순간 개는 고양이를 향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짓고, 이러한 방어적 공격행위는 고양이에게 폭력 행위로 다가오게 된다.

이념의 언어는 실상 이들에게 무용하지만, 이러한 사전 학습의 시간은 적을 인식하는 개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도 같다. 남북 간 경계는 없어져야 되냐는 질문지가 적힌 긍‧부정의 대답을 요구하는 종이가 관객들에게 나눠지고 관객은 개와 고양이로 양분된 공간의 투표함에 그 표시를 해야 한다.

정치적 견해는 무엇이나 통용될 수 있는 반면 경계라는 것, 무엇보다 인식이라는 것은 형성된 것이고, 또 새로운 시선을 작동시키지 못 하게 하는 것이란 것과 개와 고양이에게 인간의 의식을 부여하며 인간과 매우 친숙한 무언가를 생산한다고 해서 소통 체계를 같은 언어 코드로 이룰 수 없다는 당연한 현실도 보여준다.

▲ Chakkrit Chimnok

Chakkrit Chimnok은 각종 오브제들을 꺼내고 원을 흰 색으로 두른 후 작업 공간과 설치 무대를 형성한다.

젬베를 젓가락으로 치고 들어오던 그는 그 단순한 박자의 나열이 하나의 흐름과 호흡-시간을 만들어 빈 공간을 드러내며 요란함의 덧없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머리를 잘라 묶어 붓처럼 만들고 흰색 분진에 얼굴을 비벼 하얗게 만든다.

사다리와 테이블을 하나씩 각각 가지고와 무대에 놓고 사다리를 두드리며 같은 리듬을 만든다. 이런 단순하며 변화 없는 박자는 적막한 공기와 혼합되며 대위법을 이룬다고 보인다. 하나의 사운드가 아닌 사다리에 올라간 그는 흰 비닐 풍선에 채워진 물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영상에는 춤을 추는 클럽으로 보이는 공간에 선남선녀가 춤을 추는 영상이 흐르고 있고, 이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는 흰 긴 비닐에 바람을 불어넣어 묶고 채워, 영상에 걸고 사다리에 몸을 싣고 풍선을 불어 터뜨린다. 풍선이 터지는 감각과 바람이 채워져 있는 풍선은 같은 의미 계열을 이룬다. 곧 영상의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 둔 현시적 재현은 실제 찰나와 같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일깨우는 듯하다. 어김없이 탁자를 두드리고 의식을 단조롭게 담금질한 후 그는 흰색 분진에 얼굴을 문지른다.

또한 같은 박자들의 반복이 이어지고 그는 얼굴을 옷으로 닦는다.

그는 중간에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갈아입었었는데 다시 원래의 옷을 입음으로써 퍼포먼스의 종언을 알린다. 짐들을 챙겨 사라진다.

▲ 시몬

비행기 소리가 무대를 가르고 노이즈가 유동하는 스크린의 영상과 맞물려 집중의 흩어짐을 지속시킨다.

우주와 우주 밖에서 지켜 본 지구의 모습, 은하의 빛, 이것들의 아우라 평이한 멜로디에 시몬은 숨을 조율하며 호흡을 끊이지 않고 이어가며 마치 무술을 하듯 에너지를 단단하게 몸에 내재한 채 격하게 움직이다. 돌연 멈춰 숨을 뭉텅 내뱉으며 호흡하고 있다.

이는 큰 귀를 달아 더 큰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존재하며 극단의 몰입이자 일종의 자기 암시가 동반된 개인적인 행위의 이것은 법칙화되지 못 한 채 신비한 질서에서 관객의 최면을 종용한다.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다 알아들을 수 없이 중얼거리며 무엇을 돌려 빻아 바닥 위에 올린다. 무대 위에 올라가 붉은 조명 아래 한 차례 더 춤-명상을 더하고 사라진다.

▲ Ville Karel

Ville karel는 임의로 관객석 앞쪽에 있는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내 무대 바깥으로 몰고 간다. 우선 선택된 자가 먼저 퍼포먼스를 볼 수 있어 퍼포먼스의 구성원은 선택되고, 시작 역시 지정된다. 조금 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참여적인 관객을 만들 수 있다.

Villekarel는 몇 가지 음료수와 술을 번갈아 마시고 마시자마자 게워 내는 자극적인 장면들을 감각에 치닫게 만든다. 팔에는 무대에서 쓰인 ‘비현실’을 칼로 되새긴다. 이것은 선택된 자를 위한 선물이 아닌 선택된 자들에 대한 폭력의 선사이자 선택받지 못 한 사람들을 향한 의식에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비현실’은 비현실이라고 여기며 벗어나고 싶을 만큼 실재적 감각에 치닫는 현실이다.

라이브 아트는 무엇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무엇이든 실시간으로 신체와 내지 의식과 연결된 무언가를 생산해 내야 함을 의미한다. 곧 이는 매우 단순하고 동물적인 행위들과 맞닿게 하는 측면을 초래함을 알 수 있다.
 

posted by 아트신
2011. 7. 29. 02:20 Anth-e-nada(작품 포커스)

Boyet

하나의 눈이 새겨진 깃발을 세우고 하얀 모자와 연결된 흰 조각을 온 몸에 내려뜨린 채 그 뒤에는 발바닥이 그려져 있다. 흰색 물감을 바닥에 붓고 그것을 묻히며 길을 한정 없이 걸어가며 어느덧 십자가를 그린다.

Boyet

그의 등에 쓰인 글자 ‘stop the killings’가 뚜렷한 메시지를 상정한다. 예수의 초상을 목에 매고 있어 십자가와 같은 의미 계열을 이룬다. 여기세 전자 기타의 웅장하고 단순한 무게감이 아른거리고 넘실대며 느린 발걸음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정확한 시간도 없고 곧 음악으로 상정되는 멜로디나 화음 없는 의식을 각성시키고 또 잠재우는 사운드에 가없는 시간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곧 시간이 흘러갔음만의 인식, 시간은 현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옷을 벗어젖힌 Boyet은 미끄덩대는 바닥을 미끈거림을 이겨내며 걸어간다. 그리고 잡은 메가폰을 마이크를 뒤로 하고 머리에 칭칭 동여매고 걸어간다. 귓전에 윙윙대는 소리는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옮겨간다. 행진을 계속하며 메시지를 굳혀 간다.

▲ 무혜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속옷 바람으로 나타난 무혜는 풀과 입체적인 여러 이미지가 그려진 종이들을 갖고 다니며 관객에게 붙여달라고 한다. 정적이 흐르고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속삭이듯 종이 붙이기를 종용하는 목소리만이 남고. 쇼핑백, 시계, 자동차 등 이는 패션잡지에서 나오는 이미지들과 같다.

마치 물질적 코드들이 육체를 뒤덮으며 패션과 지저분함의 경계에서 육체를 지우는 육체라는 환유와 소비가 나를 옥죈다는 은유의 기호 측면이 중첩된다. 그녀는 쓰레기가 담긴 비닐봉지에 들어가서 아예 쓰레기와 하나가 되며 뒹군다.

공간을 부유한다는 표현이 맞는 그 안에서도 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간 한 끝까지 간 이후에 봉지를 벗고 자신의 몸에 있는 종이들도 떼어낸다. 그래도 말끔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벗는 행위 자체로 자유로움이 부여된다. 소리가 있지 않아 오히려 행위가 강조되고 말 없는 현대인의 관계와 소통을 말하는 데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다.

사람을 모으고 집단적인 축제의 분위기로 몰아가는 데 탁월하다.

Steve Vanoni

Steve Vanoni는 사람들을 모으고 두 줄로 가른 뒤 나눠 준 카드들이 누가 더 큰지를 보고 두 사람 중 이긴 사람을 단상으로 올려 보낸다. 밑에 남은 사람들 중 자원을 받아 뒤로 달리기 챔피언을 가리고 승자 한 명에게 샴페인을 즉석에서 터뜨려 수여한다.

Steve Vanoni

이어 단상 위 사람들을 원으로 세운 뒤 먼저 뒤로 도는 사람 한 명에게 샴페인을 선사한다. 샴페인을 터뜨린 것과 함께 폭죽을 연이어 터뜨린다.

매우 단발적이고 큰 메시지 같은 것 없는 가벼운 분위기이지만 축제 분위기를 확장하고 연장하는 시간들이다.

Narumi

기타 노이즈 사운드에 특정 움직임을 만들기, 공간을 누비며 그 음악에 기꺼이 몸을 담근다. 음악은 신비롭고 긴 호흡의 한 덩어리와 같다.

Ripley

의성어 같은 분절된 소릿값과 움직임을 일치시킨 몇 개의 리듬 기호들을 지정, 이것들을 배워보고 계속 반복한다. 제의성을 띠는 반복된 음악에 의식을 담그고 똑같은 움직임을 반복한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훈련을 통해 몸에 익어 있어 몇 개의 악구를 이루는 움직임들은 층위를 달리해 조금 덜 익숙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가도 어느새 이전에 했던 움직임으로 돌아가 친근함을 준다. 원 안에서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즐거움과 집단적인 경험을 지속한다.

‘차차차차차’ 빠르게 박자를 하강시켜 가는 움직임들이 중간 중간 곁들여진다. 음악을 끄고 천천히 움직임을 이어가며 끈끈한 경험을 연장시켜 끝맺는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1. 7. 28. 02:51 Anth-e-nada(작품 포커스)

 

퍼포먼스 부터에 근간을 둔 의식 없는 신체에 배달래 작가는 물감들을 그들의 신체를 뒤따르며 뒤범벅으로 만든다. 자연의 덕과 가치가 존중되고 인간의 작위적인 노력과 탐욕은 부정된다. 의식 없는 신체를 감각케 하는, 기타 노이즈 사운드와 반복되며 빈 공간을 뚫고 리듬을 지정하는 장구와 전제적으로 배경에 깔린 전자 사운드가 매우 강렬하게 관객을 침투한다.

장구와 기타는 거의 퍼포먼스를 하듯 그 자체로 격렬하게 악기와의 간극 곧 사운드가 나오는 공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공명이 다다르기 전 악기를 뜯고 친다. 묵중하게 전자 사운드가 깔리고 있다. 의식을 둘 곳은 없고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사운드의 재잘거림‧마찰에 굼뜬 몸은 작게 움직임만을 공간에 투여해도 되지만, 그 더딘 몸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린다. 아니 진동한다. 음악은 어느새 그 강렬한 키를 더디게 거두어버림으로써 공간에의 밀도를 낮춘다. 사운드와 물감은 거의 신체에 허용 범위 이상의 과격함을 끊임없이 투여한다는 데 퍼포먼스가 성립되고, 의식을 방기하며 신체는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극은 그 굼뜬 몸을 분절적으로 움직이고 표면에 닿는 감각에 의해 자동적으로 튀어 오르게끔 한다.

곧 사운드의 증폭된 자장 아래 머물고 있던 관객들은 그 사운드가 멈추고 나서야 그 과잉의 에너지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시계의 반복된 울림 장치들을 착용하고 신체와 연결 짓는 과정, 신체의 표상물들, 신체의 이전과 확장의 과정을 만든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로봇 공기청소기로 바람을 넣어 부풀린 하얀색 바지와의 색감의 맞춘 해삼류 같은 돌기들이 길게 수많은 뻗어 나와 있는 괴 생명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다채로운 색깔의 통일, 구조 차의 이동 중 사이렌 소리 와 경고를 알리는 두 개의 신호가 앞선 시계 소리와 섞여 들어간다.

상반신을 탈의한 가운데 지구본을 몸에 부착하고 줄 위에 걸어놓은 또 하나의 머리 가발과 같은 오브제까지 밑에 줄로 묶여 내려져 있던 양측 돌들의 줄을 당겨 끌어올린다.

팔에 찬 고리와 그 줄은 연결되어 있어 돌의 무게가 갖는 중력의 내려가려는 힘 그래서 안간힘을 쓰며 팔이 힘을 쓸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벗어나지 않게 하며 그 상태의 힘과 공간의 자장에 머물러 있기가 요구된다. 그는 한 쪽 팔을 뻗은 채 그 줄을 자르기 위해 시도하고 그 사정권을 벗어나 아예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의 어느 한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도 하나의 고리에 달린 세 개의 줄을 끊고 나서 그는 비교적 자유로워지고 나머지 한 팔에 달린 세 개의 줄도 끊게 된다.

일종의 과거에 붙잡힌 그래서 현실을 볼 수 없는 긴 시간의 터널을 통과한 것을 의미할까, 장난감들은 현실의 환유이자 어린 시절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물론 사운드의 단조로운 멜로디의 변주를 가능하게 하는 사운드 장치이기도 하다. 그가 보여준 것은 자신과의 사투. 나아가 현재 자신의 실존은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유래하고 귀착됨을 의미한다. 그 힘의 균형과 그에 닿는 멈춤 없는 수행과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끊는 것처럼 매우 간단한 의지의 수행과 결정이 곧 돌이 떨어지는 묵직한 소음을 남기는 것과 함께 달성된다.


장애인용 휠체어 대용의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슈퍼맨(축제의 자원봉사자)의 손에 이끌려 무대를 가는 SP는 일종의 역할 연기, 어설픈 역할 연기를 통한 연기의 전유라는 사실까지 내비치며 스테이지를 기어서 힘겹게 오른다. 그리고 그가 애용하는 붉은 색으로 종이에 “I will go to light”라고 쓴다.

그리고 형광등이 있는 흰 스티로폼 박스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괴시킨다. 곧 현실에 빛을 비추어 그럴싸하게 유혹하는 것은, 곧 아폴론의 철학은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매우 단순명쾌한 외침을 남긴다. 어설픈 연기의 연극적 장치와 설치 회화 등의 미디어를 가져가며.

posted by 아트신
2011. 7. 27. 11:08 Anth-e-nada(작품 포커스)

 

▲  에릭 스캇 넬슨 로드맵퍼포먼스 ‘change’

 에릭 스캇 넬슨은 ‘change’라는 글자를 염두에 두고, 홍대 거리를 큰 풍선을 들고 c모양, H모양 등 ‘change’ 각각의 알파벳 형태의 경로를 순차적으로 만들며 걸어 다닌다. 곧 일상의 도시 속 지점들은 특정한 메시지를 담은 글자에 맞춘 경로에 따라 재편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같이 걷는다는 경험이고, 그 경험 안에는 평상시의 의도 없는 길에 형태와 목적을 부여하게 된다.
곧 도시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자신의 경험을 통한 의미를 도시에 새기는 것이다.

▲ 권수임 작가

▲ SHEEDHAY_라무+카락뻰 안현숙(티벳)

사운드 아트와 연극적인 내지는 임프로비제이션 움직임이 결합되는 것은 묘한 둘 간의 간극을 낳는다. 곧 둘은 평행선상을 달리며 만나는데, 사운드는 매우 감각적이고 폭발력을 지니는 데 반해 움직임은 매우 인간적인 향수를 자아낸다. 깃발들을 들고 힘겹게 잇는 동작들이 뭔가 지켜야 할 굳은 신념과 끈끈한 인내, 땀의 결정 같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더군다나 이렇게 더운 아스팔트 위에서.



북소리의 반복된 리듬은 이것이 시작과 끝을 배분하지 않는 불완전한 서사, 단편의 이야기들만을 조합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나오는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저마다의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고 관계성을 가지지 않는다.

군인과 종업원, 복싱선수, 무언가를 앉아서 계속 깎는 남자, 돌을 놓고 물을 주고 미친 듯 행동하는 여자, 한 여자만 미친 상태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정확히 하나의 신분이나 캐릭터를 상정하는 이들은 자신의 위치와 행동의 영역을 하나도 벗어나지 못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또한 정상의 경계를 벗어나고 있다.

어린이용 칼을 들고 현실에서는 휘두를 수 없는 칼을 마구 사람들에게 휘두르고 있는 남자 또한 그러하다. 이들의 행동은 불특정한 관객에게 행해짐으로써 사실상 관계를 맺지만 그것이 관계 맺을 수 없는 미약한 행동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불통의 현대, 이상(異常)의 현대, 편집증에 걸린 일상을 드러내는 것일까.

▲ 에쉬 댄스

타악, 록적 비트의 전자 사운드까지 다양한 음악에 맞춰 떪의 신체, 몸의 분절과 박자의 변화에 맞춘 움직임을 끈기 있게 가져간다.

특히 이 움직임들의 선두에 있는 타악의 리듬은 반복에 따라 하나의 멜로디를 이루고, 그 위에 또 다른 리듬이 겹쳐지며 박자를 지정하며 끝없는 반복의 결에서 다층적인 세계를 빚어낸다.

▲ 중국작가 한빙, '신체구조물'

싱잉보울의 긴 공명의 여운 자체가 하나의 마디를 이루며 다른 마디의 울림이 겹쳐지며 끊임없이 시간을 타고 흘러간다. 이러한 사운드의 흐름 아래 자동차를 뒤에서 앞까지 이어지는 인간 띠를 자동차 위에서 또 그 바깥까지 이으며 눈을 감고 음악이 한없이 지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의 멈춤 역시 유지된다.

자동차 안에서 나오는 매연과 같은 향(이는 음악과 연속선상의 계열을 이룬다)을 맡으며 도취에 빠져 있거나 의식의 잃음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음악은 모두 같은 것 같으나 일종의 세 번 정도의 다른 곡의 전환이 이뤄지고 그 크기 및 호흡과 속도는 더 빨라진다.

▲ 타묘

「떠나라」, 「down on my knee」를 연이어 불렀다. 기타와 젬베의 단순한 리듬은 어렵지 않고 편안하되 백미는 걸쭉하며 또렷하며 힘 있는 짙은 호소력의 목소리에 있었었다. 컨트리음악 「desire」에 이어 마지막 곡「오전기피증」은
조금 더 풍부한 화음이 신나는 음악이었다.

▲ Non Grata “불가항력”

자동차 사고 후 의식을 잃고 세계가 매우 가까이 보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꼼짝할 수 없고 깨진 유리는 별들의 은하 세계가 되고 이것은 내 아마도 조각났을 신체와 큰 간극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만이 신체와 대상들을 떠돌며 점점 흐릿해져 갈 때 이러한 말의 낭독은 반복되며 하나의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 대위법적 혼돈의 층위를 덧씌운다.

자동차는 무대 중앙에서 계속 돌고 연기를 뱉어내기 시작하더니 차를 부수는 행위가 격렬한 액션의 연쇄 고리를 앞에 사람을 보고 선행 학습하는 동시에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혼합된 어떤 동기의식에 가닿은 몇몇 사람의 행위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별히 권하지 않아도 차를 부수는 행위는 매우 자발적이고 적극적이고 또 폭력적으로 보인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이 묘연해지는 사람의 의식의 한 가운데서 어떻게 문명으로 상정되는 차를 부수는 행위는 일어나는 것일까 마지막에는 그 차를 전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명쾌하게 타를 엎어 버린다.

우리가 부순 것은 과연 자동차뿐이었을까.

목소리-텍스트와의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이 상황, 아니 목소리-텍스트는 하나의 사운드로 맴돌고 기타 소리는 현의 공명을 에너지로 끌어올리며 이러한 행위들을 모두 작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일상은 곧 예술로 들어와 버리는 순간을 겪는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11. 7. 26. 08:37 Anthena-da(현장 포착)


▲ 니나노 난다

니나노 난다는 판소리의 대사와 구음의 보컬, 일렉트로니컬 사운드와 장단이 흐르는 가운데 공간으로 흩어지는 가없는 사운드와 진득한 목소리가 지정하는 명징한 가사 전달이 인상적인 팀이었따.

▲ 라무, Celine Bacque(프), the phyical poet(일), 배달래 작가의 협업 작품

허공에 루프 되며 심연을 뜯는 기타의 노이즈 사운드가 공간에 걸쭉한 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물감을 몸에 뿌릴 때마다 몸은 반응을 보인다.
시각에 의한 의식적 반응이 아닌 신체에 닿는 섬세한 감각적 반응과 사운드에 귀속되어 있는, 그래서 사운드에 유동하며 물감이 닿으면 그 잠재된 에너지를 가지고 발산하는, 의식 없는 신체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부토의 죽은 신체의 현시가 물감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범벅이 되고 흘러내리는 가운데 미끈하게 공간에서 허우적대는 움직임은 덧없는 광채를 입고 현실로 매개된다.

물감의 뿌림, 불확정성과 우연성에 기초한 페인팅이 거세지며 불협화음이 유독 거세지는 가운데 기타와 전자 사운드가 한데 뭉뚱그려진 퍼포머들에게 가해지자 그 가없는 층위의 사운드에 이들은 갑자기 웃음을 덧댄다. 몸은 굳어가지만, 사운드로부터의 해방, 현실에 마지막이자 유일한 자국을 남기며 이들이 의도했던 콘셉트인 ‘로댕의 조각’으로 굳어간다.

▲ 마술사 이제민의 공연

▲ 최동호 무당

축제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굿판이 벌어졌다. 무대를 이끄는 무당은 피카소가 죽은 지 한참 됐지만 세계 어디에서나 제 2의 피카소는 존재하고,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의 그림에 집중되어 있고 피카소의 생전 정신은 찾을 수 없다, 피카소 자체에 대한 관심은 정작 희박하다는 식의 넋두리를 풀어놓는다.

에쉬의 춤은 익숙한 대중음악들에 맞춰 짧게 등장과 함께 몸짓을 선보이며 마스크를 쓴 한 사람씩 들고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조각을 맞추며 신비스러운 음악에 맞춰 공간을 수놓았다.

▲ 이한주와 사토 유키에

사토 유키에와 이한주는 “예예예예예……”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구를 형성하며 한없이 떨어지는 마디를 반복하며 유희적인 대사 겸 사운드를 중층 시키며 사라지게 만들었다.

▲ 권수임 안무가

여기에 권수임 안무가는 머리로 붓을 대신하며 바닥에 갈린 긴 천 위를 위아래로 몸을 솟구치고 내려뜨리며 옷과 신체로 번져가는 붓 자국들을 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 이승희(마샬아츠)

posted by 아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