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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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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9. 14:24 2010KEAF REVIEW


Private, 은밀한 경험의 매개



 Kirils Pantelejevs는 환자복을 입고 이불 안에 들어가, 카메라를 프로젝터와 연결해 그 안의 상황을 관객에게 중개한다. 어릴 적 장난치듯 유아기적 증후가 나타나는 옷과 놀이, 반복되는 장난감에서 나오는 목소리, 램프를 켜두는데 어두운 공간이 하나의 톤으로 비치게 되는 배경이 전제로 상정된다. 마이크로 말을 건네다 놓고, 초코바를 먹는다. 장난감 자동차를 만지고 버튼 눌러서 시동도 건다. 담배도 피우는데, 이불이 내려와 얼굴을 덮어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거나 소통이 가로막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좁은 공간 안에서 신경 쓰며 고개를 완전히 들지 못하는 상태에서 행동이 이뤄진다. 시선을 사물에 유지하고 다루는 것에서 카메라로 오가는 자신의 사생활을 매개한다. 자신의 성기를 비추면서 "Common baby!",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실재는 영상으로 옮겨지고 카메라와 조응하며 카메라가 매개하는 현실, ‘카메라’의 현실은 다시 누워 있는 미약한 움직임의 불투명한 프레임에 가 있는 실제 그가 있는 공간을 재매개하며 한다. 카메라는 곧 시선을 통한 자아를 형성하는 거울과 같은 기능으로 작가 자신을 매개하고 또한 그에게 관객을 매개하며 의식의 확장 지점을 생성한다. 관객은 작가가 볼 수 없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독점한다. 둘의 만나는 지점, 곧 관객과의 의식이 접점을 이루는, 시선이 만나는 극명화된 순간은 실수로 Pantelejevs가 초코바를 떨어뜨려 마이크를 통해 크게 소음이 울려 퍼진 상황에서 Pantelejevs의 눈빛이 떨리며 당황스런 기색이 흘러가는 부분이었다. 그 순간에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고, 작가에게 카메라는 엄습하는 실체적 존재로서 관객의 시선을 대리하는 것임을 찰나적 인식으로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Untitled, 의식의 초월적 기제로서 생명의 육화

 철조망을 꼬아 무한대(∞) 영역의 표시로 만든 오브제를 앞에 두고, 토치 켜두고, 초콜릿과 소주를 각각 한번 베어 물고, 한 모금 마신 뒤 관객에게 돌려 나눈다. Erik Hokanson은 관객을 퍼포먼스의 같은 참여자 내지 공모자로 만드는 것이다. 철조망을 펴고 고리를 만들어 머리에 쓴다. 일종의 예수가 썼던 면류관의 상징을 내포한다. 행위를 위한 과정에서 도출되는, 행위의 전제가 되는, 무대의 조건을 구축하는 오브제가 단순하면서도 투박하게 무대에 부여된다. 토치로 담배를 불을 붙여 들이마시고 철조망에 꽂기 시작한다. 그와 같이 가방 하나에서 나오는 사물들, 가방은 일종의 잠재태로서의 퍼포먼스를 들고 오는 바구니로, 퍼포먼스를 성립시키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면류관을 쓰고 구멍을 뚫은 잔에 초콜릿을 담아 소주를 막 붓는다.


 진흙을 배에 살을 베듯 문대, 붉은 기호를 새겨 신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신체에 가하는 형벌은 텅 빈 신체를 부각하며 신화적 의미를 되찾아가는 무위의 몸짓에 가깝다. 깔때기 기능을 하는 구멍 뚫린 컵에 초콜릿을 잔뜩 담아 입에 물고 고개를 들어 그 위에 소주를 붓는다. 숨이 막히는 알코올의 수혈은 넘쳐 모든 것을 ‘정화’한다. 신체에 과부하를 거는 숨이 막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지나고 남을 때 흩어진 조각과 파편들의 알싸하고 아릿한 퍼포먼스의 감흥은 알 수 없는 실재의 에너지가 퍼져 나오는 순간이다.

 독자적이지 않은 유기체의 생명, 지구상에서 다른 유기체들과의 먹고 먹힘으로 인한 깊은 연관성의 관계, 우주 안의 지구라는 관점에서 본 태양과의 뗄 수 없는 관계와 태양이 갖는 우주에서의 상대적 지위는 원래 작가가 의도하고자 한 심층부에 깔린 이념이다. 이는 먹음의 대상이 되는 것의 타자성을 상정하며 휴머니즘의 이념을 가볍게 벗어나며 우주의 한 불안정한 존재로서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데, 오히려 일상의 유아론적 사고의 파괴를 부르는 건 신체의 영역을 파괴하며 전가되는 제의적 성찰에 가깝다. 무위의 몸짓으로 퍼포먼스는 신체를 뛰어넘어 의식의 확장을 구현코자 하는 것이다.

Smiles, 웃음으로서의 유토피아 사회의 회복


 테이블 판을 정면으로 향해 놓고, Moe Satt는 마이클 잭슨의 ‘Smile’을 틀고 테이블에 웃음의 표시를 그린다. 감상을 신비스러운 층위에 놓고, 감각이 전해지도록 막 문대는 식으로 립스틱으로 거울에 또 페인팅 한다. 테이블을 펴고 그 위에 올라 무릎 꿇고, 자신의 배에 그린다. 거울을 보며 웃음의 지표, ‘스마일’의 육화는 웃음이란 기호를 지표에서 노래가 얘기하는 행복의 이상향적 그림과 맞물려서 그 본래적 의미의 행복을 되살리는, 역시 무위의 몸짓에 가깝다. 제의적 측면에서의 기호 나눔의 행위는 공동체적 예술의 원초성에 가닿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물질문명과 현대의 속도전에서 탈주하는 유일한 하나의 경로일 수도 있다. 소통이란 측면은 일방향적인 출발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여와 공모가 의식의 외재화가 집단의식의 내재화로 향해 가는 한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관객에게 다가가 자리를 계속 옮겨 다니면서 작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공을 나눠주고 여기에 각자 스마일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뒤 다시 거울 앞 무대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얼굴에 그 코를 붙이게 해서 온통 스마일의 기호가 스스로의 얼굴을 형성하는 공이 얼굴에 덮여 마치 피에로와 같은 독특한 얼굴을 갖고, 하나의 웃음의 표상으로서, 삶의 밝은 층위의 모습을 띄우는 전령사로서. 그는 계속 극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노래는 계속 들어도 그것은 반복보다는 또 다른 신화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전한다. 계속 자세를 취하며 노래를 전유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체화한다. 웃음은 그의 몸에 묻어 있고 웃음은 실체로 우리를 마주한다. 그러한 웃음의 가치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잊어버린 것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란 미약한 메시지는 희망을 걸고 동시에 일어서는 것에 가깝다.

Camouflage(위장), 자연에의 제의적 접속


 RONALDO RUIZ는 자연을 돌아다니며 자연을 배경으로 붉은 색의 옷을 입고 누워 있거나 엎드려 있는 등의 자세를 취한다. 자연의 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하되 자연의 일부분이자 환경의 한 구성원이라는 자각 하에 고유한 예술가의 정체성을 의식의 확장된 공간에 두며 정초하는 것이다. 기꺼이 공간 안의 오브제가 되고, 신체를 하나의 점이나 덩어리로 만드는 행위의 계열선상에서 볼 때 만능의 가방에서 수행의 오브제를 꺼내 새장 앞에 서서 얼굴을 반쯤 가림은 말 그대로 신체를 변용하고 분해하는 것이다. 이어 휴대폰에 테이프를 감아 새장 안에 매단다. 깃발을 흔들고, 곡괭이로 흙이 흩어져 곳에 놓여 있는 나뭇가지 묶음을 내려친다. 나무는 자연과의 친연성을 갖고 자연을 환유한다. 곡괭이와 나뭇가지를 세우고 깃발을 그 위에 묶어세운다. 가방에는 톱밥이 들어 있다.


 이마에 은색 거울을 붙이고 나서 건전지 같은 게 줄로 삐져나온 충전지 같은 것을 한 눈에 테이프로 감고, 맹꽁이 소리 같은 울음과 함께 빛이 번쩍이는 작은 기구를 입에 물고 테이프로 붙여 돌아다닌다. 관객들에게 직접 다가가 은색 거울을 이마에 붙여준다. 마치 제 3의 눈으로 자연과의 일체화 내지는 접속을 종용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과 현대 문명의 접합의 인위적인 의미망은 자연에의 순환적 인과관계의 연금술적인 의미의 도출 속에서 물질문명의 위태로운 위치를 내려놓고 자연으로 화할 수 있다고 보인다. 자연의 되살림은 생명에의 갈망에서 출현하며 원초적인 제의성으로 현실을 매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는 흙을 손으로 쓸어 모으고 물총을 난사한다. 흙에서 흙으로 물에서 물로 돌아가는 원리는 자연의 의미망을 자연스레 체현하는 것에 가깝다. 그의 작업에 있어 그 지연의 원초성이란 다시 자연에의 동화 의식과 의식의 확장성에서부터 출현하는 것일 것이다.

 나무를 부셔 다시 가방에 담고, 모든 것은 자연으로 화하며 하나의 알레고리 속으로 흡착된다. 마치 마법의 가방은 자연을 신화적인 무엇으로 꺼내고 펼치는 창구로서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나무를 자신의 신체에 감는다. 가방을 덮고 빨간 테이프로 묶는다. 불편한 신체로 몸을 끌고 곡괭이로 가방을 부개며 끝을 낸다. 물질에서 자연으로, 신체로써 그 둘을 매개하며 자연에 접속하는 물질의 불안정한 혼융적 층위에서, 그것을 깨며 다시 자연의 넓은 층위로 나아간다. 작가의 행위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죽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쓰레기란 개념이 인간에게서부터 유래하는 것임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The Nature of a red dot, 예술의 경계를 시험하는 렉처 퍼포먼스


 Dovrat ana Meron는 관객들에게 질문으로 사유를 촉발한다. 빨간 점에서부터 시작해 계속해서 빨간 점과 연관 지은 것들이 얼마인지 묻는 경매의 방식에서, 신용카드로 지불한다는 적극적인 관객의 입장도 나타난다. 점에서, 점이 뚫려 결함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옷, 점이 뚫린 것이 장식이 되어 하나의 온전한 옷이 되는 옷,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떼지 않고서의 옷 등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따라서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니는지를 물어 그 가치에 표면적으로는 동조하게 하면서도 예술에 가격이 매겨지며 예술가의 의식이 상품으로 분해되는 예술이 자리하는 방식에서 예술과 예술에 대한 인식을 성찰케 한다. 또한 사진과 DVD 등으로 예술의 부산물로서 복제되는 예술의 유통 과정을 제시하고, 그것이 갖는 원본과의 상관성을 묻는다.

 작품명이 붙은 작품을 상정시키는 명찰들이 붙어 있는 판에서, 작품이 팔릴 때 붙이는 것이지만 오리지널을 확인시키는 붉은색 점 스티커, 곧 그 점이 얼마냐를 묻고, 작품명 부분에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찍어 작품이 열린 미술관의 이름을 말하며 빨간 피가 배어 나오게 한 뒤 찍는다. 자연스레 ‘이것의 작품은 얼마인가?’를 묻는 것에 연관되어서 작가의 행위는 미술관의 이름을 지정해 그곳에서 전시가 열렸다는 명제와 뒤따르는 유효한 작가의 날인으로서 피로 작품과 작품의 판매까지를 성립시키는, 수행발화적인 언어로써 역사를 현재로 만들며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의 언어는 작품에 대한 지표이자 공간의 의미를 작품과 결부시키고 작품을 물질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동시에 그것이 묻은 작가의 정신적 증거를 우위에 세운다.

 곧 예술작품 이전에 예술가의 우위를 두는 것이면서 동시에 작품이 작가를 포함한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인식을 전략적으로 보여주며 이러한 행위의 결과가 다시 상품화되는 연쇄과정 하에 예술을 수여한다. 예술가의 고유한 정체성의 독립적인 가치는 작품으로 분배되며 이는 상품으로 쉽게 치환된다. 여기서 그녀는 예술가가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예술이 존재함을 역설하지만, 그것 역시 실체화되고 매체에 매개됨으로써 낳는 또 하나의 기록으로서 가치를 갖는 것으로, 예술가의 인식을 벗어남을 보여준다. 수행의 현재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붙잡는 무용한 기록들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이 묻어 있다. 다만 그 현재성은 인식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우리의 의식의 자장을 파고든다. 예술적 물음으로서.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