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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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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1. 14:26 Anth-e-nada(작품 포커스)

Kinki Iori

 면면히 흐르는 기의 유동한 흐름, 명상적인 세례를 퍼붓는 음악에 하얗게 분칠한 무표정한 얼굴로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 붉은색 조명이 핏빛으로 완전 깔리고 두 손을 위로 들고 핏덩어리 육신으로 변한다.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오고 다른 층위로 트랜스된다. 일본의 문화적 누층이 표피적으로 증발되며 묘한 분위기를 남기고 이해되거나 해독될 수 없는 텍스트 층위에 맞춰 이의 정서는 감지되기 어렵다.
 문화적 누층은 그것과 조응되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 그의 몸을 타고 나오기보다는 문화적 소비를 이룬다. 무엇보다 에너지를 어떻게 갈무리하고 펼쳐내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팔을 펼치며 얼굴에 인상을 쓰고 정면을 응시한다. 무언가를 인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관계 맺음이 아닌 죽음의 신체를 증여하는 방식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가깝다.
 
Tochikawa Kyo


 씨어터제로 극장의 벽에 두 다리를 올리고 나자빠지는, 온 몸의 긴장과 에너지를 유동하는 신체의 구불거림에 발산하는 공기는 에너지의 흐름에 맞닿아 전이되며 서서히 뻗쳐가고 또 멈추며 그것을 끌어오는, 곧 환경과 단단히 결부된 움직임은 의식의 확장이 세상에의 접속 내지 흩어짐을 통해 무화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클래식이 나오고 팔을 올리고 가슴으로 끌어안다 내린다. 강한 긴장이 발을 벌리며 가는데 미친다. 클래식의 에너지에 격정적으로 팔과 다리를 놀린다. 그 음악 자장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곧 그것의 멜로디가 일으키는 정서와 리듬의 단위에 호흡은 미세한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개를 뒤로 젖혀 썩은 입의 천장을 보여준다. 숨을 턱턱 내쉬며 힘겹게 간다. 클래식을 전유하는 몸짓은 그로테스크하게 나타난다. 팔을 젓고 자유롭게 움직임을 구가한다. 숨을 몰아쉬며 기괴함 이전에 생명의 약동임을 드러내는 기제를 적용한다. 음악의 전유가 건조한 틈을 타 그것의 빠르기에 대한 반발적 작용으로 움직임의 리듬이 변이됨은 차라리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기보다 호흡의 거세짐을 가리키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대무용의 몸짓에 가깝다. 거기서 문득 입을 벌려 죽음의 기표를 생성할 때 균형의 지점이 깨지게 된다.


 Fujieda Mushimaru
는 아들과 함께 등장, 개울 소리가 들리는 자연에서부터 출발, 그는 깊은 명상에, 시름에, 또는 죽음에 잠기지만 아들은 철없이 논다. 그는 삶을 자각할 수 있거나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아이는 그저 자유롭게 세상을 구가한다. 개울이 흐르고 몸이 씻겨 내려간다. 만져질 듯 촉각적 전이를 일으키는 아스라한 더듬음으로 시각을 장식한다. 아이의 몸을 더듬어가듯 내지르는 아련한 손길은 애타는 부정의 보이지 않는 역설로 고양된다. 아이를 등 뒤에 업고 한 바퀴 돌며 재출현하는 그의 움직임에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환경에서의 실존적 층위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이가 극장의 기둥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그는 비로소 격렬하게 움직임을 더듬어가고 충동적인 몸의 에너지를 체현하며 몸을 꺾고 흐트러뜨리고 펼쳐놓기 시작한다. 붉게 물든 조명은 자연의 알레고리 하에서 석양을 상정하는 듯하고 빨간색을 입고 그는 또 다른 층위로 건너뛰어 의식을 전환하고 아들에게로 간다. 같이 오르고 그는 기둥에서 흐느적거린다. 내재된 리듬 층위에 침잠해 들어가는 과정과 자연을 적응하며 맞서는 현실적 층위가 교차되어 스펙터클한 광활함의 미학과 내면의 집중을 통해 내재된 리듬의 재발견을 통해 미세한 감정 층위들을 석어낸다.


 ‘복숭아꽃 살구꽃……’, 노래에 맞춰 서승아는 노인의 몸을 현시하며 걸어온다. 세월을 스프링처럼 튕기면서 삶과 죽음 층위의 경계선상에서 자유롭고도 거대한 궤적을 꾀고, 그것은 결코 결기 있게 무겁지 않고 오히려 가볍다. 다만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느낌으로, 이는 죽음의 무게, 죽음의 덩어리진 기억들에 가까울 듯하다.
 그것들을 더디게 벗어놓고 손가락까지 미치는 팔의 전율을 신체로 확장해 의식을 마구 흩뿌리며 왔다 갔다 한다. 마치 무당의 굿을 보듯 끊임없는 돌아감으로서의 반복이자 격렬한 떨림을 보여준다. 이는 몸의 관성적 돌아감의 측면도 수반한다. 그런 움직임 속에 이미 삶은 약동하기 시작하고, 멈춰 앞을 인식하며 숨을 내몰아 쉴 때 자각하는 것은 삶이고 또 죽음 층위에 직면한 자신이다.


 마치 예전 뽕짝 같은 음악에 맞춰 그녀는 풀잎을 손으로 내가리듯 하고 다시 내려 허벅지를 치는 동작을 반복한다. 전체적으로 계속된 반복의 관성적인 움직임으로의 승화가 주효하게 작용한다. 의식을 무화시키는 것 자체를 인식하게 하는 죽음 층위의 신체는 음악을 색다르게 전유한다. 음악에 맞추는 것으로, 음악에서부터 출발하기보다 장구에 진동 기길 반동을 준다. 사토 유키에의 장난감 악기는 ‘챙챙챙’, 공허한 적막을 만드는 울려 퍼지는 충격으로 파열되고, 장구의 실재에 이봉교는 구음을 넣자 리듬은 유동하기 시작한다. ‘챙’, 심연을 후벼 파는 자국, 다른 층위 표면을 투박하게 긁는,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 사운드는 죽은 신체를 부르는 게 아니라 먼저 어떤 하나의 신호로서 등장한다.

 음악에 조응하기도 하고 죽은 신체의 얼굴을 띠고 유령처럼 배회하고, 휘몰아대는 소리의 에너지에 주체하지 못하는 몸의 흐느적거림을 구현하게 된다. 막 뒹굴기도 하고 난잡한 판 의 사운드를 전이하기보다 사운드에 중독‧마취되어 가는, 그것이 덧입혀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음악에 다가서는 것은 하나의 실체로 그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타악의 흥겨움에 제대로 몸을 싣지 못한 채 음악에 끼어 있고, 그것이 기괴한 신체의 현존을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흐름 하에 가져가게 한다.

 Fujieda Mushimaru는 또한 아이와 딱 붙어 춤을 춘다. 아이가 그에 부착되고 기입되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가 무얼 하건 그에 달라붙는 것이다. 또한 그 달라붙음에도 그는 그것을 떼어 내지 않고 하나로 연결한 상태에서 움직임을 더디게 수행한다. 몸을 모두 같이 붙여 다리를 올리고 떨기도 하고 누워 몸을 느리게 하여 더미를 이룬다.
 이러한 더미는 집단적인 조화를 이루기보다 덩어리 육신을 나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특정한 의미를 형성하거나 관계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의식적인 게 아니라 단지 무의식적 접착이다. 조명이 밝혀지고 하얀 몸을 비틀고 더듬고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몸을 전시하는 그는 익살스럽거나 망령이 난 늙은이와 같이 묘한 웃음을 디고 몸을 뒤척거린다.


 집단적인 묶임은 역시 하나의 전시하는 신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달되며 죽음에서 벗어나 죽음의 표피만을 기입하는 클리셰로 하나의 충동적 소산에 다름 아니다. 조명의 색이 계속 바뀌고 신체에 덧입혀진다. 이미 음악과의 구분은 없고 음악 역시 존재치 않는다. 리듬과 가파름은 모두 유동하는 신체로 화해 있다. 음악적 메아리는 춤의 파동으로 전유되며 둘이 일으키는 에너지는 하나로 승화해 하나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부재하는 방식으로서 분출의 조합과 충돌이 구현되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