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

블로그 이미지
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트신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010. 8. 31. 14:58 Anth-e-nada(작품 포커스)


삶의 가상이 실재로 화하는 순간


 엎드려서 가는 투명한 천을 뒤집어쓰고 기어 나와 가에 놓여 있는 상자로 들어가 안에서 하얀 수조 안에 들어가 고개를 든다. 신체가 반사하는 빛은 뿌옇고 불투명하면서 투명하게 신체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는 원이 됐다 신체로 육박하다 동그란 점으로 다시 나타난다. 손이 검은 실체로 다가왔다 조명이 꺼지자 갇힌 신체의 실재성이 드러나고, 다시 조명이 밝혀지자 신체가 그에 파묻혀 있음을 인지케 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전이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녀의 내면으로 확장되어 그 위에 가닿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다시 나타난 여자는 몸을 수그리고 명상에 젖고, 드디어 그것이 경계선상에 놓인 어떤 매개의 접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갇히도록 만든 공간으로 전유되게 된다. 위에서 비추는 조명은 뒤돌아 있는 신체를 쓰다듬고 검은 형체와 함께 이중으로 그림자가 비친다.

 방의 유리는 사방으로 확대되고, 실체로 드러나는데 정면을 돌았을 때 움직임이 만드는 궤적이 페인팅과 같은 흔적을 남기게 되고, 온전히 신체가 드러남으로써 그 경계 프레임은 이제 사라진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 투명한 것이 빛을 만나며 그림자를 남길 때 외에는 어느 순간 경계는 무화되는 것으로, 거기에 다시 여자의 파란 물방울이 끊임없이 기포를 일으키며 올라가는 것이다. 신체에 덮이며 빛은 퍼지고, 햇빛과 동물의 표피․세포․바이러스가 마구 요동치며 그 속으로 들어가는 시점의 운동성이 화면에 기입된다. 이상한 유희적인 흥얼거림 이후 영상이 꺼지자 유리에 대고 ‘호’ 불며 그 속의 공기가 많지 않은 절박한 느낌과 답답함을 준다.
 과실 같은 것의 영상이 겹치고 그것이 꺼지고 돌며 몸을 뒤척인다. 이와 같은 영상의 알 수 없는 출현의 배경은 세계를 확장시키거나 미시적 세계의 일면에 들어가는 신체가 하나의 접속망이 되고, 이후 신체만이 남아 공허와 적막을 전유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흰 천을 온 몸에 칭칭 감아 그 안에서 둘러싸이며 끝난다. 이는 처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곳으로의 회귀, 곧 연약한 막을 거치고 단단한 벽에 갇혀 방향을 잡거나 앞을 향하지 못하여 빛이 차단된 동굴과 같은 심상의 장소에서 소멸되고, 시작의 어스름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오히려 삶의 실재성을 가상성으로 치환하게 된다.
 
전쟁의 현실을 전유하는 토탈 퍼포먼스


 야광의 가면은 얼굴이 되어 끄덕거린다. 한 명씩 탑처럼 쌓아올려지고, 사운드의 증폭과 소거에 맞춰 사람들의 움직임은 한 명씩 궤적을 그리면서 하나로 모아지게 된다. 팔을 모으고 양분되게 펼쳐 오르락내리락한다. 계속해서 분절된 행동을 선보이고 진영을 다시 재편하며 집단적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난 뒤에 뭉쳐서 하나로 움직이다 퍼진다. 도깨비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는 이들은 극적인 미를 살리며 하나로 뭉쳤다 음악 그치면 다시 와해된다. 하나의 극적 환경의 구축 이후, ‘이 속담을 해석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동화 내지 신화적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동시에 ‘당신들이 잘되길 바랐습니다. 사악함과 증오로…… 칼날로 목을 베되 갚음을 해주어야겠습니다.’ 같은 의도적 폭력의 상관 고리를 재창하여 본론에 접어든다.
 어린 아이들은 어머니 모습을 흉내 내며 전유하고, 사회 일련의 현상들을 트집을 잡아내고 자각하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소위 기표들의 놀음은 사회적 의미에 속하면서 다시 미끄러진다. 생각나는 단어들이 초현실주의적 배치를 이루고, 그 뉴스의 뉘앙스를 띠거나 하며 사건들의 배치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진다.


 군인이 소녀를 납치하여 데리고 가는 동시에 핏빛 성찬에서 꿈틀대는 움직임과 동화의 생명력을 상정하는 사운드가 나온다. 여자는 관객석으로 소멸하고, 갑작스레 등장한 여자들은 테이블보를 천으로 닦고, 히틀러 문양이 새겨진 테이블보를 펼쳐 접는다. 시선은 영상으로 옮겨지고 담배를 피우면서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이 둘은 사람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만드는 3S정책 시절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며 사회적인 의미를 전용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친다. 채팅의 문장으로 납치된 아이의 상황을 글로만 보여주며 소리를 전용한다. 접시를 놓고 다시 거두고 접시와 빠져나가려는 소리가 병치되어 묘한 상관관계를 이룬다.

 어설픈 전유는 별 의미를 담지 않는 사건들의 재현으로, 가볍지만 그 의미는 가볍지 않음 음에서 어떤 식으로 현실이 소비되는지, 이미지의 복제와 가상성으로서 구성된 현실의 전 세계적 경향의 심각성을 오히려 생각하게끔 한다. 피아노를 치고 드로잉을 하고 바이올린 내지 첼로를 켜는 것의 기표로써 캔버스를 누빈다.


 ‘전쟁 체제는 각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독립적인 체제로, 전쟁이 없으면 합법성에 문제가 생기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 정권은 와해되는 것이 진리로 증명되며 개인의 이익의 팽창이자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전쟁’(「전쟁은 사랑이다」), 화면에 놓인 포크는 여유작작한 정서적 흐름의 위협을 형성하고 동시에 그것을 막으며 경계와 경계 안의 구속과 지배를 구현한다.
 군인은 누워서 무기력하게 몸을 부스럭거리고 앞선 군인의 성적 폭력을 치환시키는 가운데 익명의 누군가에 가하는 위협과 공포, 적의 상정을 은유하는 군인으로서 영상을 입고 육이오 때의 군인의 몸을 전유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천에 피를 뿌리고 잘라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찾은 사람은 번민할 것이며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곧 실재계를 마주할 때 가상에 도취되어 현실을 망각할 수 없음을, 하지만 종속된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결단을 내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배우들은 지시 받은 것을 그대로 지키며 구현하는 상태에서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문화적 누층이 배어 나오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전유의 어색한 연기로 나타난다.

존재의 변주 : 변이와 복제의 욕망


 예전 1900년대 초 배경 흑백 사진들, 말 그대로 이국적인 장면의 사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빨리 사진들이 바뀌고 화면을 컬러를 입고, 현대로 넘어온다. 점층적으로 쌓이는 사진들은 도시의 속도와 수많은 사건들의 궤적과 맞물리며 속도가 빨라진다.

 Edwige Mandrou는 관객과 화면의 중간에서 거울 앞(카메라)을 보되, 화면에 투영되는 바는 그녀의 얼굴이 데칼코마니처럼 두 개로 갈리고 다시 두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며 화면 중앙으로 얼굴이 사라지는 과정의 반복적 출현이다.
 화장과 분장 등을 중간 중간 가하고 가깝고 멀게 위치하며 얼굴의 각도를 기울이고 펴고 하는 것의 조절을 카메라로 중계함으로써 눈코입이 붙은 원숭이에서 이마 궤적이 큰 프랑켄슈타인으로, 다시 코가 작은 해골로 얼굴이 달라지는 여러 방식이 새로운 얼굴들의 재출현을 구현한다. 이는 이질적인 모습으로 관객 자신이 생각한 심상에 겹쳐지기도 한다. 일종의 이미지 병치 기법이 적용되는 가운데, 두 얼굴로 나뉘거나 눈코입이 하나인 얼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괴물 얼굴들이 분절되고 조합되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출현이지만, 크게 보면 온전한 신체가 됐다 갈라지는 것과 두 신체가 갈렸다가 붙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두 개의 동형 신체는 갈리면서도 그 형체를 유지하며 오히려 분절 신체로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구가한다.

 화면에는 사회 현상들이 흩날리고 뉴스의 소리가 배경 사운드로 깔린 상태에서 맥놀이를 이루는 어릴 적 거울을 갖고 하는 놀이로서 ‘얼굴 변형’의 욕망의 전이와 다른 것이 되는 것의 ‘변신의 유희’는 성형이라는 것이 어쩌면 전혀 다른 욕망에서 출현하는 것일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화장을 하는 것 역시 다른 캐릭터가 되는 것으로, 고정된 실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 치환해 볼 수 있다.

 화면에서 벗어나 쇼걸의 인위적인 마스크를 쓰고 춤을 춤은 다른 인간으로 변모한 것을 드러낸다. 간단한 비트의 전자음악을 전유하며 화면에는 반동력 있는 탱탱한 줄이 그 탄력의 성질을 잠재한 가운데 줄의 흔들리는 움직임이 음악에 맞춰지고 그것을 머금고 서서 이미지와 사운드를 점점 일치시킨다. 작가는 춤에서 박수를 유도하기 시작하고, 이내 모래에 머리를 거칠게 파묻는다. 이는 타조가 두려움에 떨 때 자신의 머리를 모레에 처박는 데서 온 표현으로, 정치가가 위선적인 행동할 때를 비유하는 정치에 관한 프랑스의 문화적 표현이다.


 빛을 내며 유동하며 움직이는 헬기 소리가 나고, ‘퍼포먼스 여기’라고 쓰인 쇼핑백을 앞에 두고, 그것의 치열하고 단단한 몸의 긴장을 내재한 퍼포먼스로써 수행의 지점을 낳는다. 이는 엄밀히 비도덕적인 행동과는 다른 차원이다. 전쟁의 상황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의 상징적 의미 외에 실은 그것이 긴장을 유발하는 기제로서, 맥놀이를 구현하기 위한 소품인 것이다.

 퍼포먼스는 박수를 유도하는 움직임으로 변해가다 극장 기둥으로 오르고 우리나라 말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나서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생일 축하합니다! Korea"하며 경제적 파워에 따라 잘라진 빵들을 관객들에게 건네며 퍼포먼스 장을 후속적인 의식의 움직임으로 퍼뜨린다.

일렉트로닉 핑퐁 : 탁구와 미디어의 접합

 일명 컵으로 하는 탁구 경기는 화면에 매개되고, 유리잔으로 치고 진 사람이 술을 마신다. 사람들이 탁구대로 삼는 판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그 안에서 공이 화면과 출현한다. 컵과 사람은 실재이고, 가상공간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화면에 부감 쇼트로 비칠 때 사람은 드러나지 않고 화면에 밀착되어 움직이는 유리잔이 실체로, 그리고 경계선에 맞을 때 나는 마찰․충격 등이 색으로 나타난다.

 게임의 쾌락은 묘하게 가상이 실체에 자리 잡는 어느 순간에 있다. 탁구공의 소리가 잔의 소리로 치환되어 울려 퍼질 때, 유리잔으로 공을 넘겨 부딪칠 때 매개되어 나오는 소리는 비가시적인 어떤 회로를 상정하고, 여기에 더해 잔을 치며 전자음이 섞이는 연주를 하게 된다. 화면 안에 움직이는 것은 실체에 의해 매개되고 전이되며 잔을 프레임에 놓을 때마다 그것이 반짝거리며 화면에서 퍼져나간다. 그리고 잔을 놓았던 곳에 잔상이 일며 공의 움직임의 분절되어 번져나가는 것으로, 빛과 파동이 거기서부터 그려지고 생성되는 것이다.

전자 악기들의 향연


 얼굴까지 연결된 색색이 변하며 반짝이는 모자를 쓰고, 로봇 같은 신체로 등장, 역시 빛이 나는 흡입하는 반주의 디저리두를 불고, 리듬을 타는 남자의 팔 위에 키보드를 조작함은 곧 흐르는 빛들을 조절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태평소를 불어제치고 디저리두도 흥을 돋운다. 분절되는 연주 방식의 소리는 빠른 단속적 움직임에 조응하는 결과로서, 소위 ‘전자 디저리두’ 연주를 유투브 방송에 올렸을 때 미국에서는 ‘세계 전자 모기’라는 반응이 왔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타악기와 IT와 접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었다고 했다. 이어 ‘멀티 드럼’, ‘일렉트로닉 기타’, ‘일렉트로닉 장구’가 만난다. 


 모듬북 형태의 멀티 드럼은 북의 연주 기법으로 살려내고, 소리는 크게 증폭되고 확대되도록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장구는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거세게 몰아붙인다.
 악기들은 서로 파고들며 조응하고, 앙코르로 「아리랑」이 연주됐고, 치닫는 진폭의 치솟는 에너지는 치열한 수행의 결과물로, 경쾌함의 무르익음은 몸의 감각을 감싸고도는 열정적인 반응으로 끌어올려진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