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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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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1. 12:23 Anth-e-nada(작품 포커스)

 

예술로써 정치를 이야기하다


 윤진섭 작가는 퍼포먼스에 활용될 오브제에 관한 자신의 일화를 먼저 소개한다. 전철을 타려고 하는데 노점상 아주머니의 오토바이 장난감 파는 얘기가 재미있어 우선 사고 난 뒤 생각해 보니 노점상 사람들의 사회 경제가 만드는 삶에 쫓기는 현실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예술은 정치를 파괴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한다.
 휴게소 소음이 뒤섞인 음질 나쁜 노래들처럼 조악한 노래를 분출하며 돌아가는 레일 위를  달리는 인형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그 신체에 고정된 얼굴의 지각 항등성의 원리를 역전하며 인위적으로 갖추고 있고 다시 형성되는 표정, 그리고 끊임없이 레일을 도는 두 개의 인형의 운동 움직임은 묘하게 만나고 미끄러진다. 이러한 관계성의 미학에서 고정된 얼굴이 상대와의 관계를 상정하며 마주할 때 쫓아가다 다른 방향으로 가며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리듬의 출현과 틈은 인형을 존재로 상정하고, 두 존재를 하나의 무대 안에 놓는 무의식적 인지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작가는 임의적으로 만나게 할까 자문을 취하다 그건 퍼포먼스 규칙에 이배된다고 판단해서인지 중단한다.

설원에서의 축제


 Rubens는 개막식과 같이 상징적 표상의 흰 옷을 입고, 흰 래커를 군데군데 서로 교차로 뿌려 준다. 신체가 분절되는 지점 또는 튀어나온 부분인 무릎, 발, 성기께, 엉덩이, 가슴 등을 뭉쳐 덮는다. 후각적 심상으로 번지고, 하얀 시각적 전위와 축제처럼 간다. 한편 기름지고 층지게, 또 끈적거리며 달콤함 덩어리로서의 케이크의 심상을 가져간다. 흥겨운 노래가 나오고 그에 맞춰 신체를 흔들어 댄다.

이미지의 끝없는 환유 작용


 분홍색 줄로 테두리를 치고, 사다리를 세우고 붉은 풍선 묶음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풍선 하나씩을 사다리 다리에 하나씩 떼어 건다. 포르노 잡지들의 종이들을 찢어 무어라고 쓴지 확인하기 힘든 그만의 알 수 없는 문자 기호들을 적고, 성적인 소비의 대상물을 새롭게 전용하여 의식을 담되 그냥 날려버림으로써 이를 기억의 흐릿한 자취로 치환한다. 소비는 소멸로, 실체는 이미지에 대한 소비로, 소비는 기억으로, 기억은 소멸로, 소멸은 실체로 가는 기억과 소멸 사이에서 그것의 헛됨을 의식하게 한다.
 작가가 적은 바는 작가 말로는 일곱 가지 죄를 상징한다고 한다. 아울러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등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차원에서 죄 역시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의 분리적 의식에서 조금 더 가치를 넓은 층위에서 상정하고, 관계적 측면에서 둘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파티 신의 현전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물총 쏘며 유희로서 전쟁을 마구 감행하다가 즐거이 놀고, 커피 잔 안에 비키니 입은 남자들에게 상대방의 가면을 임의로 써서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치환하며 자유로워진다. 마지막 곡에서 사람들을 다 끌어들여 관객들 막 춤을 추고 흔들어 젖히면서 골반과 다리를 흔들어대며 몸을 음악에 맡기고 집단적인 신비 의식에 도취되며 보이는 것에 대한 자유로움의 의식을 신체의 기표를 증발시키는 방식으로써 의식의 무화와 보여주기로서의 자의식을 고취 시킨다.
 이는 기표의 발산과 증발만으로 이루어진 파티에서의 무화된 관계 맺음과 접촉의 극대화로서 자의식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가면이 갖는 평등하고도 일탈의 지위를 상정하며.

도시의 반대편에서...


 꽃 화분에 들은 사탕을 하나씩 나눠준다. 오브제이지만 신체 나눔으로 볼 수 있고, 커피 잔에 들어가 있는 꽃잎을 하나씩 뜯어 잔 안에 뿌린다.
 서교예술실험센터 옥상에서 시작된 퍼포먼스에서 Jill McDermid는 관객을 지하로 이끌고, 토치의 불꽃이 주는 명상성에 하얀 설원 공간이 흘러가는 영상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관객에게서 등져 앉아 그것을 전유한다. 누워서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는 희구의 자세를 품고, 도시에서 자기만의 내면의 공간에서 꽃잎들을 놓고 앉아 자연을 의식적으로 체화한다.
 이러한 행위가 어느 정도 유효한 전략으로 성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작가는 관객에 대한 의식을 거두어 다른 층위에 접근함으로써 다른 층위에 대해 가정케 한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0. 22:50 Anth-e-nada(작품 포커스)

 
어릴 적 순수한 기억으로서 전쟁

 갈개로 나무를 갈고, 샹송은 신나는 분위기를 이끈다. 여유롭게 마음껏 유희의 몸짓으로 갈개를 들고 날리며 유유자적 종이비행기처럼 띄운다. 비행기는 추락하거나 폭격의 증후를 내재하지 않고, 작가는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의 자잘한 움직임으로 노닌다.

 작가에게 있어 전쟁은 그 그릇된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전쟁의 긍정적인 의미의 전유와 회복을 가리킨다.
 즉, 작가에게 있어 전쟁이 하나의 상징적 기호라면 전쟁은 긍정․부정의 전쟁이란 두 개의 상징으로 치환되기보다 보통 인류적 동태의 중요한 부분을 장식하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전쟁의 상징 자체를 지우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작가는 언어의 미끄러짐 속에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부정적 의미의 전쟁이란 언어를 환치하고 전쟁이 임재하지 않는 본래적 삶으로 도약한다.
 그렇다면 전쟁의 인류사가 낳은 비극의 과거이자 실상은 역사의 잔여물이거나 긍정적 삶의 관계와 유희의 태도를 그릇되게 오인하거나 망각하는 것임을 작가는 은연중에 전제하는 것 아닐까.

귀여운 인형 같은 보컬, 전자사운드 가미한 밴드, ‘밀크티’


 인형과 같은 무화된 목소리로서, 전자사운드에 맞춰 춤을 춘다. 여느 밴드와는 다른 상큼한 느낌을 극대화해서 전자 사운드의 날카로움을 최대한 무디게 하고, 안무는 귀엽게 녹아들게 하고 손짓으로 온 몸의 에너지를 몸에 가냘프게 띄우는 식으로 귀여움으로 발산한다.
 약간 뇌쇄적인 매력이 비치는 ‘너에게로 향하는 나에게로 미치는’ 관계의 상정 아래 묘사하는 노래가 이어졌다.

 흥겹게 발을 구름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내파의 과정을 서서히 불러일으키며 층위의 전환은 한 지점을 향해 구멍을 만들고 다시 메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0. 22:45 Anth-e-nada(작품 포커스)


「아가씨」, 「피노키오」, 「Boy & Girl」(에이스매직_이제민), ‘동화 같은 극적인 이야기에 녹아들은 마술’


 가마 놓고 도령으로 분장한 마술사 이제민은 조선시대 정도의 역사적 배경을 안기는 극을 상정하며 전반적으로 마술을 극적인 내러티브를 갖춘 공연 양식에 접목한다. 천에서 꽃봉오리가 되는 간단한 마술로 보통의 장미꽃 마술을 치환함으로 시작해 전반적으로 ‘춘향전’의 스토리를 차용하여 무대를 만든다.
 신부와의 동화 같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이후 사또가 각시탈을 씌우고, 상자에 신부를 가두고 칼을 쑤셔 넣자 손을 들어 항복한다. 상자를 벗겨내자 사람이 바뀌어 있고 포졸이 가면을 벗자 여자가 나타난다.
 마술봉을 들고 걸으면 사운드 효과를 줘서 발을 맞추는데, 마술봉을 흔들 때마다 마술사는 경쾌한 소리를 자연 받는 데 반해 관객석에서 자원해 나온 한 아이가 흔들 때는 소리가 다르게 들려 웃음을 준다. 특정한 자세를 잡자 비로소 같은 소리가 나는, 특정한 눈속임이 아닌 매체와의 조응으로 마술을 만든다.
 이는 공연에서의 리얼리티를 관객으로 전이시키는 것으로, 소리 나는 것은 단지 맞추는 것이지만, 곧 음향 감독 등이 조정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무대에서는 리얼리티를 상정하기에 그것을 교묘하게 실재와 무대라는 것에 대한 인지 사이에서, 내지는 감각과 사유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춤을 립싱크하며 추고, 여자를 기타 앞에 위치시키고 안아 올려 허공에서 옆으로 누인 상태를 만든다.

「귀향」(강정균), ‘노스탤지어’로부터 출발한 본래적 삶의 회복



 고명숙의 반복된 노래는 고향의 구성지고도 구수한 느낌을 선사한다. 강정균의 마임은 그 노래에 맞춰 어머니가 올 때의 아련한 향수 같은 노스탤지어를 체현하고 자극한다. 마임의 표현력을 고스란히 살려 춤으로 녹여내 아기로 돌아가고, 손을 빠는 과거 몸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구체적인 행동의 배경은 실재로서 상정되기에 구체성과 함께 행동은 매우 현실성을 띠게 된다. 노래가 계속 반복됨에 따라 푹 침잠되는 분위기를 얻는다.


 어린 아이가 홍시 같은 미끄덩하면서도 달고 실한 과실을 베어 먹으며 몸피가 커짐 커지면서 어떤 도달해야 할 현실적 목표를 상정하고 고향에서 자꾸 멀어지고 또 성장하고 그 몸만큼 채워야 할 것들도 많아지지만, 한없이 달리기만 하는 세상에서 멀어진 노스탤지어는 역설적으로 현실을 떠나 다시 죽음의 태아적 기억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육화되며 고향의 안온한 기억도 되살아나 물 같은 휴식의 선물을 안겨주게 된다.
 여기에서 몸짓을 통한 표현으로 나타나는 물질/마음의 크기를 물리적으로 가늠하기 어렵거나 그 둘의 차이를 쉽게 양분할 수 없음에도, 어찌됐건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 하에 단단한 힘이 내재하고 그것을 의식이 상정하거나 내지는 몸짓의 확장과 수축으로 마음의 크기는 만들어진다.

「"GUT, Gooooooood!"」(이미희), 유려한 몸짓의 시간의 전유


 북 위에서 가녀린 동작으로 슬슬 펴 올리며 몸의 주름은 한복의 비단결 같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주름과 같이 순식간에 아릿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유유한 자취는 어떤 억누르는 정서 속에서도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를 보여주고, 북을 품에 안아 한의 덩어리로 전유하고, 신체의 확장으로서 의식을 부여하며 그것과 노닌다.
 북의 끈을 어깨에 걸머쥐고 길을 떠나되 아무도 곁에 없는, 홀로 저만치 가있는 뒷모습으로 아련하게 자취를 남긴다. 붙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 단지 시간의 흔적만을 더듬으며 좇아가지만 저만치 가고 그녀는 없다. 그 흔적이 가볍지만은 않다.

정경화, ‘판소리를 체험하는 시간’

 “잘한다!”, “좋지!”, 판소리를 함께 공유하고 전유하는 방식이 있음을 알리고, 그 추임새라는 것을 배워본다. 이로써 관객과의 한 바탕 판을 벌이며 노는 것이다. 노래 한 곡조를 뽑고 여기에 추임새가 더해진다. 판소리에 비트가 깔려 독특한 층위를 만든다.
 「춘향가」의 구성진 목소리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깊이를 메아리로 만들어 출렁거리는 진폭으로 접고 펴는 그 자신의 운동을 하며 울려 퍼져간다.
 멜로디를 지정하지 않고 발화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양상으로 점층적으로 덮여가며 하강을 기약치 않는 상승의 맥놀이로 끝 역시 지정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어야”를 유도하여 관객의 흥과 장단을 추임새 삼아 「뱃노래」를 불렀다.

김광석, 시간을 누비는 기타의 경지


 그의 손은 자유자재 막힘이 없고, 거칠 것도 없다. 시간을 마음대로 쓰고, 그에게서는 곧 시간을 물질로 늘리고 줄이며 그 깊이를 재는 게 가능하다. 기타의 퍼지는 소리는 마치 향처럼 다가온다.
 「섬집아기」를 치는데, 어렸을 적 들었을 때는 마냥 즐거웠는데 지금 연주하면 슬퍼진다고 이야기를 붙인다. 「바위고개」를 이어 했고, 기타로 민요를 연주함으로써 육화된 기억을 새롭게 체현케 했다. 「백도라지」 역시 다른 음계로 새롭게 전유해서 연주했다. 그가 오늘 연주한 곡들에는 소위 문화콘텐츠라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인위적으로 지정하는 표면적인 형식이나 전략적 지점에서의 선점이 아닌 우리나라의 문화적 누층이 순수하게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이들이 자라는 미래가 되어 있을 때는 경쟁률이 심하지 않을 테니 각자 꿈을 가지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World Improvisation'(Celinne Baque, Moeketsi Koema, 김봉호), 너울대는 에너지의 자장




 장구와 노이즈 사운드 무대를 누비고, 약동하는 에너지는 땅을 딛는 데도, 몸을 펼치는 데도 크게 자리한다. 벽에 기대서서 춤을 추되 몸을 털며 문화적 기억이 묻어나오게 하고, 에너지를 진동시켜 나오는 아프리카의 리듬에 한국적인 것들이 묻어난다.
 셀린이 돌며 내파하는 에너지를 물질처럼 뭉텅뭉텅 잘라내며 서서 거의 절정의 기량을 쉬이 뽐낸다. 약간의 위태로움도 암약하는 에너지에 닿아 있는 것처럼 셋이 모여 몸을 기대고 하나의 덩어리를 만든다. 에너지의 전이가 이뤄지는 얼굴은 진지하지만 꿈틀거림이 내재한 긴장으로 팽팽하다. 의식이 온 몸으로 뻗쳐 있는 가운데 얼굴은 단지 감각하는 거죽일 뿐이다.
 서로 기대 손을 모으고 걷기도 하고, 한 명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도 하며 몸의 지지대가 되어 주기도 한다. 몸을 꺾고 누비는 광활한 영토에 피가 흐른다.


 손을 위로 교차하며 그것에 끼어들고 서로 어지럽게 이지러지며 층위를 직조한다. 의식을 나누는 등에 기대 조용히 음악을 육화한다. 사운드가 하강하며 신체 역시 끝없이 침잠한다. 물구나무서서 에너지를 침잠하며 온 몸으로 확장 전이시켜 에너지를 담지한다. 앞을 보며 비로소 끝을 낸다. 



 즉흥에 의한 즉흥, 즉흥의 절정에서 탄생하는 즉흥의 마력, 모든 것을 분산시키는 기표들의 분출, 끊임없이 바뀌는 현존의 메커니즘, 달구어진 불덩이판, 웃음․땀범벅이 농후해지는 움직임, 문화적 누층으로서 기억, 춤의 실재성, 이 많은 것들이 뒤섞여들어 에너지가 넘실대는 판을 직조해 낸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0. 22:32 Anth-e-nada(작품 포커스)


Non Grata, 전쟁의 발생과 봉합의 과정의 전유 전략

 “예술은 전쟁이다!”, 확성기에 녹음된 관객의 목소리가 반복된다. Non Grata는 각국에서 온 아티스트 둘과 관객을 골라 그들의 몸에 개막식 때 이용한 상자 오브제를 씌우고, 'USA', 'GBR', 'AISA', 전쟁을 환유하는 사운드의 물총이 기본적인 도구로 동원된다.

 Tross는 표적 같은 것을 팔, 가슴 등에 붙여주는데, “Show start!"에 ‘물총 쏘기’ 전쟁이 펼쳐진다. 서교예술실험센터 옥상에 설치된 커다란 커피 잔에 설치 작품 안에 물이 채워진 상태에서, 그 안에서 경계구역을 상정하고 싸움이 맹렬히 유도되는 것이다. 순식간에 점화한 경기는 폭력성과 야만성, 나의 보호 구획 짓기에서 연유한 방어막으로서 국가라는 상징의 무력함, 폭력과 광기의 분출이 멈추자 소강상태를 맞고 휴전이 자연스레 형성되며 그 순간을 자연스레 이용하여 기념사진을 찍는 절차가 마련되었다.

 물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 공교롭게도 아시아 사람으로 상정된 관객은 상대적으로 몸이 많이 작아 실제 국제 정세에서 아시아가 갖는 정치적 영향력을 은유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옷이 찢어지며 국가라는 그 상징적 의미가 지워지고 감추어졌던 실체가 드러난다.
 다 같이 모여 사진을 찍고 역사적 휴전의 기록이 되고, 이는 신체로 발현되는 데 반해 몸의 기억은 부재하며 공허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는 것일까! 곧 문화적 기억이 지워진 상태에서 기억은 사라지고 단지 매체만 남는다. 현대의 매체로서의 기억의 전이와 복제는 삶의 부재하는 방식으로만 현실이 기록됨을 의미한다.
 역사와 매체, 이후 남은 건 봉합의 과정으로, 평화로의 한 순간에 기실 그 신체에 내재하는 삶의 육화된 기억들이 나타나게 될까?

이제민, 가벼운 마술의 전초전

 카드 마술을 가볍게 먼저 선보인다. 한 명의 관객을 동참시킨 후 카드를 고르게 한 후에 입에서 카드들을 물고 카드 사이를 벌리고 그 관객에게 보여주는데 계속 맞추지 못한다. 나중에 토해낸 한 장이 맞는 카드로 밝혀진다. 또 숫자 생각하게 하고 맞춤 판 내리면 썼던 숫자가 나타나는 마술, 카드 날리고 칼로 찍어 선택된 관객이 가리킨 것을 꼽자 관객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김광석, 기타의 무애의 경지

 기타에서 춤을 추듯 손이 노닌다. 자연스레 숨을 고르고 감흥을 가늠한다. 그 옷이 맞는지 입어보고 벗고 다른 옷을 입는 것처럼 재빠르게 그의 문체는 변화한다.
 리듬은 곡의 선정의 하나의 구조를 자연스레 파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굉장히 기타는 조용한데 춤을 추기 위한 전초전 성격으로 깔아주는 경향이 강하다.

박일화, ‘선녀춤’과 삶의 휴식의 집단적 체험

 손을 뻗으며 가는 그녀에게서 일종의 명상적 의식을 체현하는 상태로 나아감이 느껴진다. 선녀가 목욕하듯 옷에 물을 묻히고, 장구 소리가 거세지며 가까이서 들으면 귀청을 꽝 때리며 자극하는 소리를 낸다. 옷을 유유히 벗어젖히며 한쪽에 가서 제를 올리고 기복적 믿음으로서, 관객들에게 연꽃 만지는 행위를 하도록 한다.
 이후 커피 잔으로 들어간 그녀의 움직임은 선녀의 목욕이 현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연꽃의 나눔은 가상으로 가기 전 그 층위를 단단하게 매어두는 것에 가깝다.

 음악에 맡겨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모든 짐을 내려놓고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아라리요 아라리 노래 소리 들려오네 나도 좋고 님도 좋고’하는 고구려밴드의 「아우라지 뱃사공」을 틀고, 그 안에서 자연스레 움직임을 만든다. 치유 기능으로서, 춤을 춘다기보다 즉흥으로 신체를 이완하고 몸을 흩뿌리고, 서울이라는 도시의 기억이 묻어 있지 않은 시공간을 상정한다. 그녀의 시끄럽거나 뛰노는 음악 안에서 명상을 취하는 것이 놀랍게 느껴진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0. 22:22 Anth-e-nada(작품 포커스)


 디제잉은 가속도를 밟고, 장구의 리듬으로 매개된다. 한편 기타 노이즈 사운드는 춤을 춘다. 음악적 멜로디와 리듬을 내재한 판에 기타의 실재 매질이 끼어들며 파고드는 것이다. 둘은 섞여 들어가고, 실재의 순간을 지정하며 시간성을 드러낸다.

 광란의 흔들어대는 춤, 오래 전 곡들로, 익숙한 코드들의 약간의 변용에 가까운 곡들로 리믹스된다. 외국 작가들의 유희적 놀이가 춤판에 어울리며 열띤 분위기를 이어갔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0. 22:12 Anth-e-nada(작품 포커스)


Edwige Mandrou, 국가의 육화


 철사가 이어져 바람에 유동적으로 부유하듯 날리며 움직이는 풍선 꽃으로 단 풀장에 한 편에 마련된 칵테일 바, 여기에 화려한 의상을 입은 쇼걸은 경제 순위에 따라 크기를 배분해서 자른 잘려진 하나의 빵에 여러 개의 국기들을 꼽고,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빵을 선택해 먹도록 한다.
 하나의 작은 빵에 꽂힌 여러 국기는 가난한 나라를 상징하고, 각국의 경제 순위를 고려하며 빵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실상 국기들이 촘촘하게 간격의 차이를 크게 보이지 않게 박혀 있어 빵의 크기를 가늠키 힘들게 되어 있어 보이는 것 가운데 임의적인 선택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Mandrou는 나눔의 의식 이전에 상징화된 기호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것의 해체화 전략을 실천한다. 국기들은 국가들을 상정하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생소한 것의 차이는, 온전히 국가를 기호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이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무용의 이미지로 남게 된다. 작가는 상징을 육화하는 행위로서 잔에 들어가서 호스를 불어제친다. 곧 빵이 단순히 빵이 아니라 국가이고, 그것의 살을 먹는 것이기에 환유의 상징적 기능은 실재의 부대낌으로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

 이 국기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작가의 말은 수용자의 몫으로 순전히 증여하는 실천적인 과제를 안기기보다는 잠재태로서, 의식의 지점을 추후 남기는 것에 가깝다. 물로 들어가는 건 그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예술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또한 관련 없는 것으로서 장소 특정적인 수행이 이전 콘셉트와 병치되며 지적 사유를 는 결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Kinki Iori, 죽음의 귀환과 삶의 자리

 ‘삐’ 소리가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거울 보면서 머리를 넘기며 의식을 무화시킨다. 시간은 정지되어 있고, 숨 막히는 정적에 있어 숨 쉬는 ‘나’를 자각하게 한다. 꽃을 향해 갔다 옷을 벗고 천천히 노닌다. 몸의 결을 따라가되 구불구불 몸의 궤적을 만듦은 생각의 유영을 뜻한다. 곧 의식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온 몸으로 이식되고 분배되어 움직임을 의미한다. 몸의 중심은 흔들리는 것으로 보이나 팔다리의 구분은 없고 몸의 경사는 위태롭지 않다.
 보이스 사운드가 나오면서 체를 비우고 용을 무용으로 한다. 허공을 응시하다 역시 커피 잔 설치 작품 속 물로 빠져들며 죽음의 늪에서 죽어도 죽지 않음, 곧 삶을 잉태하는 망각된 삶의 자리로 들어간다.
 전체적으로 목적 없는 행위, 의지 없는 의식, 무의식을 매개하는 몸을 완성함의 여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0. 22:05 Anth-e-nada(작품 포커스)



 디제리두의 ‘엥’ 울리는 소리는 독특한 발화로 드러난다. 문짝으로 가리어진 데서 연주는 구음과 같은 독특한 층위로, 인간의 목소리로 전용되어 나타난다. 여기에 ‘라무’의 춤은 원시적 주술성을 살리는 데서 시작된다.
 여기에 장구가 더해지는데 이 분위기 속에서는 역시 이상하게 변용되어진다. 라무는 자신의 앞으로 덩굴 내지 굴레, 어둠을 상정하고 그것을 헤치고 나가고, 눈을 가려 시각을 무화시키며 청각과 신체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물질적인 어떤 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외줄타기 광대를 연상시킨다.

 노이즈가 회오리치는 것으로 전환되고, 신비스러운 층위에 사운드가 가득 채워지고 빛은 물결무늬를 만들고 있어 황홀경으로 간다. 장구의 ‘삐’ 채우고 있는 사운드는 귓전 안에서부터 내파하며 몸 안에서 머문다.
 라무는 단지 혼란 속에서 의식을 무화시키는 듯하다가도 움직임을 이어가는데, 단단히 의식을 신체에 담지하고 있다. 이는 인지하기보다 자각하는 것으로, 불현듯 진해지는 어떤 것을 전유하는 것이다. 어두운 빛 그림자 속에 희미한 자취의 신체로 내비치는데, 그 안에 치열한 움직임은 보이기보다 관조되는 것이다. 고조되다 어느덧 무화되는 그 깊이는 점층적으로 채워지며 환원된다.   

 파도소리는 물결치며 공간을 덮는다. 사운드는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고, 이후 디제잉이 잠식한다. 반복적으로 점층적으로 울려 퍼지는 사운드는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몸의 리듬을 따라가며 감각할 것을 요청한다.
 기차 경적 같이 반복되는 사운드는 작아졌다 커졌다 미세한 차이로 조절되고, 이어 멜로디 는 오르간 같은 장중한 소리로 덮이고, 노이즈가 귀신 소리처럼 루프 되며 시작됨은 긴장을 주며 적막을 깨는 소리는 신체로 이전된다. 곧 ‘딩딩’ 두드림을 타고, 긴장의 계단을 형성한다.

 무정형의 공간에서 공기를 찢는 소리는 비장하고, 다시 되돌아가며 공허함을 안긴다. 플라멩코 같은 격렬한 리듬을 타고 진동하기도 하고, 건반은 ‘챙’ 하고 내려뜨려지는 깨짐의 속성을 일깨우듯 파괴되지 않고 루프 된다. 즉, 어떤 사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연속된 긴장으로 실재계에 접속하며 물질로서 도발한다. 파편이 아닌 고무줄 같은 것으로 생명력을 갖고 벗어나지 않는, 파열되나 결코 죽지 않는 몸은 아주 미니멀하고 디테일하게 들어간다. 그것은 신체 에너지를 담지하고 오히려 서정적으로 보일 정도로 가냘프게 춤을 추되 기도하듯 팔을 흐느적대는 것이다.

 날카롭게 가늠 지점을 타고 쟁반의 쨍그랑 소리 ‘emergency’(비상사태)의 경구가 울리고,  실재의 물질 따라붙는 행위의 순간, 건반은 이동하는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빠르게 간다. Kinki Iori는 위로 들쳐 업고 Tochikawa Kyo는 무방비 상태로 몸을 내맡긴다. 사운드가 막  되는 대로 두드리는 듯한 연주로, 거의 무의식적 경로로 분출된다.

 하나의 경지를 이룬 듯한 태엽인형처럼 도는 사운드에서 천천히 튕기고, 잔잔하게 그 뜯음의 행위를 품고, 재잘대듯 끊임없이 멈춰서 움직이며 별빛을 터뜨리듯 펑 하고 터뜨린다. 그냥 천천히 누이고 현을 뜯는 행위로 연주하고, 또 잔잔히 기타를 친다. 굉장히 한국적이며 세월을 담는 내러티브로, 인생의 굴곡을 조용히 뜯는 것에 가깝다. 또한 그 스스로 만든 현판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는 특정 악기의 형식이 없는 상태를 상정하고 정확한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 기타의 손(선율) 가는 대로 악보는 거의 동시적으로 진행된다. 수행 이후 비로소 악보가 만들어진다. 음계는 다르게 그리고 그것의 매질로서 실재에서 나오는 음이 다양하게 자리한다. 곧 물질적인 것은 연주 기법에 따라, 강도에 따라 연출이 안 된 원래의 소리로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0. 21:35 Anth-e-nada(작품 포커스)



시간의 전유를 통한 사유



 권수임 작가는 커다란 시계가 바닥에 놓이고, 작가는 부질없는 몸짓으로 시간 밖에서 시간 자체를 전유하려 애쓴다. 이를 통해 삶에 각인된 기억을 도출하고, 순간의 찰나에 시간을 바라보지만, 기실 스스로를 바라보게끔 만든다.
 
요정의 재현


 Eshe & nabah의 시간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움직임에 가해지는 신비로운 층위는 지상으로 하강하는 이미지와 결부된다. 단체로 에워싸서 집단적 움직임으로 나아가며 나무와 같이 한 덩어리를 이뤘을 때 음악의 흥겨움이 더해지며 각자 흩어져 다른 움직임들 펼쳐낸다. 교태 어린 몸을 분절시키기도 하고, 어깨춤과 골반의 흔듦은 땅의 진동과 박자를 체현하며 몸의 중심은 단단히 유지한 채 팔을 좌우측으로 꺾고 비틀고 하여 팔로 조타 역할을 하고, 끊임없는 흔들림 가운데 안정감 있게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내 안의 낯선 타자의 전용

 기타 멜로디가 서정적인 선율을 만들고, 그 속에 바람결에 얇은 옷이 나부끼는 전원으로 상정된 장소에 Tochikawa Kyo는 한 소녀를 연상케 한다. 기괴함을 부르는 몸짓의 극단적인 것, 상체를 뒤로 젖히며 입을 벌리고 의식을 몰아의 상태로 몰아간다.
 누워서 몸을 수축하고 비비꼬며 어렸을 적의 음악이 잣는 기억을 더듬어 가되 과연 그녀는 현재 어디쯤 위치하는가?, 정신을 내려놓고 신체 자체에 에너지를 싣는다. 추억을 헤치고 가며 상상계에 내동댕이쳐진 실재계의 몸은 현대 무용의 여리고 가는 선을 다소 투박하게 내지르는 것으로 전용되어 시작된다.
 음악의 신비스러운 층위를 바람결로, 또 일종의 마법처럼 처리하며 의식의 무화와 표정에서 귀신과 악마를 꺼내 보인다. 이는 엄습하는 실체로 다가오는 것으로, 내 안의 낯선 타자를 끄집어내 보이는 것이다.

짧은 시간의 신호등에서의 이벤트 둘


 ‘아트탱고’와 까뽀에이라 팀, ‘무젠자’는 신호등이 켜지면 횡단보도로 나가 ‘신호등 퍼포먼스’ 공연을 펼쳤는데, 그 시간이 정말 짧았다.
 참여자로서는 횡단보도를 평소 관성적으로 건너는 것이 기실 생각 없이 오직 그 거리만큼의 실제 경험을 지우며 빠르게 지나가야 했음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일단 예술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 그 장소의 경계가 어디까지 되는지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으로서 ‘신호등 퍼포먼스’는 유효해 보인다.




 아트탱고는 횡단보도 양편에서 그냥 사람들과 함께 똑같이 신호등을 건너다 만나서 탱고를 추었다. 파트너가 따로 정해져 있는 대신에 그룹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자유롭게 손을 잡고 서로의 몸에 휩싸이는 것이다.
 파란불이 줄어들면 경찰관이 질서 조정자로서 다급해지는 모습이다. 판을 벌이다 빨리 접어야 하는, 또 파란불이 되면 빨리 건너며 판을 벌일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짧지만 강렬한 경험으로 화한다.



 까뽀에이라의 움직임은 원초적인 야생의 인간 몸짓과도 닮아 있는 문화적 원형을 짐작케 하고, 무젠자는 끊임없는 회전의 반경을 그리는데, 마치 비보이 댄서와도 비슷한 궤를 그린다. 둘 씩 짝지어 일종의 춤을 추는 가운데 따로 외떨어져 가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 호흡을 맞추며 큰 에너지를 형성해야 한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아트탱고 팀보다 더 과감하게 신호등의 빨간불이 켜져도 움직임을 마치고 유유자적 들어오는 모습이다.

사진 & 글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09. 9. 15. 09:48 Anth-e-nada(작품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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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에 흰 색 마스크를 뒤집어 쓴 익명성과 보편성을 갖춘 사람들은 달리기 시작하며 혼란스러운 사회를 조직한다. 마네킹들이 흩어져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 죽었다는 소리를 하고, 미쳐 있다. 대단히 연극적인 상황에서 흑표범은 신기한 듯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따라다니기도 하고 따라 하기도 한다.

 작가는 혼란스러운 세계에 한 발 나와 있지만 곧 그 세계를 전유하는 과정으로 그녀에겐 꿈일 수도 있고 판단 중지의 혼란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은 멈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현실은 진행되지 않고 기억만이 떠돌기 때문이다.

 가슴 한쪽과 성기를 내놓은 작가는 아담과 이브의 이브처럼 순수하게 그것들을 보이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자극적이다.

 흰 연기가 나오며 일순간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 죽음이 아니라 상황의 정리에 가깝다. 한동안 얕은 조명이 은은히 그들 위를 덮고 있을 때 그녀가 하품을 하고 일어나 세상을 본다. 꿈을 꾼 것이기도 하고 재편된 세계의 감각이 전이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은 듯 누워있는 사람들을 만지지만 그것이 죽음으로 인지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녀가 또 다른 세상 즉 관객으로 그 시선을 넓혀 애타게 도움을 청하고 겨우 한 명의 관객을 끌어내고 나서 자신을 기둥에 옷을 풀어 기둥을 묶고 달려가지만 기둥에 묶여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몇 번 거친다.

 죽은 사람들과의 거리를 은유적으로 다시 전유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까움의 기조가 전면을 흐르는 것은 같다.

 결국 그녀의 슬픔이 전이된 것일까? 세상을 깨우는 데 성공하는데 그들은 끈이 잡아당기는 물리적 거리처럼 정면을 향해 다가서지 못하는 간극을 상정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그녀 역시 그러한 전환의 지점에서 다시 잠들었다 깨어난다.

 세계는 나의 의식과 연관되어 재편되되 그것은 너무나 낯선 방식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실재를 겪는 것은 끔찍하되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내러티브는 앞선 방식으로 연결되어 결말을 내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앞선 연극적인 스타일은 잊을 때도 된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09. 9. 15. 09:44 Anth-e-nada(작품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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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chel Hoffman은 연출과 서사를 갖추게 하는 노래와 분장과 연기가 갖춰진 연극적 상황에서 그러나 별 내용도 없고 쇼적인 의미만 가득한 옷을 갈아입고 몸을 흔들어 젖히는 연극을 했다. 뭔가가 나올 듯한 마술과 같은 분위기의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

posted by 아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