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

블로그 이미지
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트신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011. 7. 29. 02:20 Anth-e-nada(작품 포커스)

Boyet

하나의 눈이 새겨진 깃발을 세우고 하얀 모자와 연결된 흰 조각을 온 몸에 내려뜨린 채 그 뒤에는 발바닥이 그려져 있다. 흰색 물감을 바닥에 붓고 그것을 묻히며 길을 한정 없이 걸어가며 어느덧 십자가를 그린다.

Boyet

그의 등에 쓰인 글자 ‘stop the killings’가 뚜렷한 메시지를 상정한다. 예수의 초상을 목에 매고 있어 십자가와 같은 의미 계열을 이룬다. 여기세 전자 기타의 웅장하고 단순한 무게감이 아른거리고 넘실대며 느린 발걸음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정확한 시간도 없고 곧 음악으로 상정되는 멜로디나 화음 없는 의식을 각성시키고 또 잠재우는 사운드에 가없는 시간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곧 시간이 흘러갔음만의 인식, 시간은 현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옷을 벗어젖힌 Boyet은 미끄덩대는 바닥을 미끈거림을 이겨내며 걸어간다. 그리고 잡은 메가폰을 마이크를 뒤로 하고 머리에 칭칭 동여매고 걸어간다. 귓전에 윙윙대는 소리는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옮겨간다. 행진을 계속하며 메시지를 굳혀 간다.

▲ 무혜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속옷 바람으로 나타난 무혜는 풀과 입체적인 여러 이미지가 그려진 종이들을 갖고 다니며 관객에게 붙여달라고 한다. 정적이 흐르고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속삭이듯 종이 붙이기를 종용하는 목소리만이 남고. 쇼핑백, 시계, 자동차 등 이는 패션잡지에서 나오는 이미지들과 같다.

마치 물질적 코드들이 육체를 뒤덮으며 패션과 지저분함의 경계에서 육체를 지우는 육체라는 환유와 소비가 나를 옥죈다는 은유의 기호 측면이 중첩된다. 그녀는 쓰레기가 담긴 비닐봉지에 들어가서 아예 쓰레기와 하나가 되며 뒹군다.

공간을 부유한다는 표현이 맞는 그 안에서도 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간 한 끝까지 간 이후에 봉지를 벗고 자신의 몸에 있는 종이들도 떼어낸다. 그래도 말끔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벗는 행위 자체로 자유로움이 부여된다. 소리가 있지 않아 오히려 행위가 강조되고 말 없는 현대인의 관계와 소통을 말하는 데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다.

사람을 모으고 집단적인 축제의 분위기로 몰아가는 데 탁월하다.

Steve Vanoni

Steve Vanoni는 사람들을 모으고 두 줄로 가른 뒤 나눠 준 카드들이 누가 더 큰지를 보고 두 사람 중 이긴 사람을 단상으로 올려 보낸다. 밑에 남은 사람들 중 자원을 받아 뒤로 달리기 챔피언을 가리고 승자 한 명에게 샴페인을 즉석에서 터뜨려 수여한다.

Steve Vanoni

이어 단상 위 사람들을 원으로 세운 뒤 먼저 뒤로 도는 사람 한 명에게 샴페인을 선사한다. 샴페인을 터뜨린 것과 함께 폭죽을 연이어 터뜨린다.

매우 단발적이고 큰 메시지 같은 것 없는 가벼운 분위기이지만 축제 분위기를 확장하고 연장하는 시간들이다.

Narumi

기타 노이즈 사운드에 특정 움직임을 만들기, 공간을 누비며 그 음악에 기꺼이 몸을 담근다. 음악은 신비롭고 긴 호흡의 한 덩어리와 같다.

Ripley

의성어 같은 분절된 소릿값과 움직임을 일치시킨 몇 개의 리듬 기호들을 지정, 이것들을 배워보고 계속 반복한다. 제의성을 띠는 반복된 음악에 의식을 담그고 똑같은 움직임을 반복한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훈련을 통해 몸에 익어 있어 몇 개의 악구를 이루는 움직임들은 층위를 달리해 조금 덜 익숙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가도 어느새 이전에 했던 움직임으로 돌아가 친근함을 준다. 원 안에서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즐거움과 집단적인 경험을 지속한다.

‘차차차차차’ 빠르게 박자를 하강시켜 가는 움직임들이 중간 중간 곁들여진다. 음악을 끄고 천천히 움직임을 이어가며 끈끈한 경험을 연장시켜 끝맺는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1. 7. 28. 02:51 Anth-e-nada(작품 포커스)

 

퍼포먼스 부터에 근간을 둔 의식 없는 신체에 배달래 작가는 물감들을 그들의 신체를 뒤따르며 뒤범벅으로 만든다. 자연의 덕과 가치가 존중되고 인간의 작위적인 노력과 탐욕은 부정된다. 의식 없는 신체를 감각케 하는, 기타 노이즈 사운드와 반복되며 빈 공간을 뚫고 리듬을 지정하는 장구와 전제적으로 배경에 깔린 전자 사운드가 매우 강렬하게 관객을 침투한다.

장구와 기타는 거의 퍼포먼스를 하듯 그 자체로 격렬하게 악기와의 간극 곧 사운드가 나오는 공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공명이 다다르기 전 악기를 뜯고 친다. 묵중하게 전자 사운드가 깔리고 있다. 의식을 둘 곳은 없고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사운드의 재잘거림‧마찰에 굼뜬 몸은 작게 움직임만을 공간에 투여해도 되지만, 그 더딘 몸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린다. 아니 진동한다. 음악은 어느새 그 강렬한 키를 더디게 거두어버림으로써 공간에의 밀도를 낮춘다. 사운드와 물감은 거의 신체에 허용 범위 이상의 과격함을 끊임없이 투여한다는 데 퍼포먼스가 성립되고, 의식을 방기하며 신체는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극은 그 굼뜬 몸을 분절적으로 움직이고 표면에 닿는 감각에 의해 자동적으로 튀어 오르게끔 한다.

곧 사운드의 증폭된 자장 아래 머물고 있던 관객들은 그 사운드가 멈추고 나서야 그 과잉의 에너지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시계의 반복된 울림 장치들을 착용하고 신체와 연결 짓는 과정, 신체의 표상물들, 신체의 이전과 확장의 과정을 만든다. 그의 분신과도 같은 로봇 공기청소기로 바람을 넣어 부풀린 하얀색 바지와의 색감의 맞춘 해삼류 같은 돌기들이 길게 수많은 뻗어 나와 있는 괴 생명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다채로운 색깔의 통일, 구조 차의 이동 중 사이렌 소리 와 경고를 알리는 두 개의 신호가 앞선 시계 소리와 섞여 들어간다.

상반신을 탈의한 가운데 지구본을 몸에 부착하고 줄 위에 걸어놓은 또 하나의 머리 가발과 같은 오브제까지 밑에 줄로 묶여 내려져 있던 양측 돌들의 줄을 당겨 끌어올린다.

팔에 찬 고리와 그 줄은 연결되어 있어 돌의 무게가 갖는 중력의 내려가려는 힘 그래서 안간힘을 쓰며 팔이 힘을 쓸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벗어나지 않게 하며 그 상태의 힘과 공간의 자장에 머물러 있기가 요구된다. 그는 한 쪽 팔을 뻗은 채 그 줄을 자르기 위해 시도하고 그 사정권을 벗어나 아예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의 어느 한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도 하나의 고리에 달린 세 개의 줄을 끊고 나서 그는 비교적 자유로워지고 나머지 한 팔에 달린 세 개의 줄도 끊게 된다.

일종의 과거에 붙잡힌 그래서 현실을 볼 수 없는 긴 시간의 터널을 통과한 것을 의미할까, 장난감들은 현실의 환유이자 어린 시절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물론 사운드의 단조로운 멜로디의 변주를 가능하게 하는 사운드 장치이기도 하다. 그가 보여준 것은 자신과의 사투. 나아가 현재 자신의 실존은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유래하고 귀착됨을 의미한다. 그 힘의 균형과 그에 닿는 멈춤 없는 수행과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끊는 것처럼 매우 간단한 의지의 수행과 결정이 곧 돌이 떨어지는 묵직한 소음을 남기는 것과 함께 달성된다.


장애인용 휠체어 대용의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슈퍼맨(축제의 자원봉사자)의 손에 이끌려 무대를 가는 SP는 일종의 역할 연기, 어설픈 역할 연기를 통한 연기의 전유라는 사실까지 내비치며 스테이지를 기어서 힘겹게 오른다. 그리고 그가 애용하는 붉은 색으로 종이에 “I will go to light”라고 쓴다.

그리고 형광등이 있는 흰 스티로폼 박스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괴시킨다. 곧 현실에 빛을 비추어 그럴싸하게 유혹하는 것은, 곧 아폴론의 철학은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매우 단순명쾌한 외침을 남긴다. 어설픈 연기의 연극적 장치와 설치 회화 등의 미디어를 가져가며.

posted by 아트신
2011. 7. 27. 11:08 Anth-e-nada(작품 포커스)

 

▲  에릭 스캇 넬슨 로드맵퍼포먼스 ‘change’

 에릭 스캇 넬슨은 ‘change’라는 글자를 염두에 두고, 홍대 거리를 큰 풍선을 들고 c모양, H모양 등 ‘change’ 각각의 알파벳 형태의 경로를 순차적으로 만들며 걸어 다닌다. 곧 일상의 도시 속 지점들은 특정한 메시지를 담은 글자에 맞춘 경로에 따라 재편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같이 걷는다는 경험이고, 그 경험 안에는 평상시의 의도 없는 길에 형태와 목적을 부여하게 된다.
곧 도시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자신의 경험을 통한 의미를 도시에 새기는 것이다.

▲ 권수임 작가

▲ SHEEDHAY_라무+카락뻰 안현숙(티벳)

사운드 아트와 연극적인 내지는 임프로비제이션 움직임이 결합되는 것은 묘한 둘 간의 간극을 낳는다. 곧 둘은 평행선상을 달리며 만나는데, 사운드는 매우 감각적이고 폭발력을 지니는 데 반해 움직임은 매우 인간적인 향수를 자아낸다. 깃발들을 들고 힘겹게 잇는 동작들이 뭔가 지켜야 할 굳은 신념과 끈끈한 인내, 땀의 결정 같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더군다나 이렇게 더운 아스팔트 위에서.



북소리의 반복된 리듬은 이것이 시작과 끝을 배분하지 않는 불완전한 서사, 단편의 이야기들만을 조합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나오는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저마다의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고 관계성을 가지지 않는다.

군인과 종업원, 복싱선수, 무언가를 앉아서 계속 깎는 남자, 돌을 놓고 물을 주고 미친 듯 행동하는 여자, 한 여자만 미친 상태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정확히 하나의 신분이나 캐릭터를 상정하는 이들은 자신의 위치와 행동의 영역을 하나도 벗어나지 못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또한 정상의 경계를 벗어나고 있다.

어린이용 칼을 들고 현실에서는 휘두를 수 없는 칼을 마구 사람들에게 휘두르고 있는 남자 또한 그러하다. 이들의 행동은 불특정한 관객에게 행해짐으로써 사실상 관계를 맺지만 그것이 관계 맺을 수 없는 미약한 행동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불통의 현대, 이상(異常)의 현대, 편집증에 걸린 일상을 드러내는 것일까.

▲ 에쉬 댄스

타악, 록적 비트의 전자 사운드까지 다양한 음악에 맞춰 떪의 신체, 몸의 분절과 박자의 변화에 맞춘 움직임을 끈기 있게 가져간다.

특히 이 움직임들의 선두에 있는 타악의 리듬은 반복에 따라 하나의 멜로디를 이루고, 그 위에 또 다른 리듬이 겹쳐지며 박자를 지정하며 끝없는 반복의 결에서 다층적인 세계를 빚어낸다.

▲ 중국작가 한빙, '신체구조물'

싱잉보울의 긴 공명의 여운 자체가 하나의 마디를 이루며 다른 마디의 울림이 겹쳐지며 끊임없이 시간을 타고 흘러간다. 이러한 사운드의 흐름 아래 자동차를 뒤에서 앞까지 이어지는 인간 띠를 자동차 위에서 또 그 바깥까지 이으며 눈을 감고 음악이 한없이 지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의 멈춤 역시 유지된다.

자동차 안에서 나오는 매연과 같은 향(이는 음악과 연속선상의 계열을 이룬다)을 맡으며 도취에 빠져 있거나 의식의 잃음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음악은 모두 같은 것 같으나 일종의 세 번 정도의 다른 곡의 전환이 이뤄지고 그 크기 및 호흡과 속도는 더 빨라진다.

▲ 타묘

「떠나라」, 「down on my knee」를 연이어 불렀다. 기타와 젬베의 단순한 리듬은 어렵지 않고 편안하되 백미는 걸쭉하며 또렷하며 힘 있는 짙은 호소력의 목소리에 있었었다. 컨트리음악 「desire」에 이어 마지막 곡「오전기피증」은
조금 더 풍부한 화음이 신나는 음악이었다.

▲ Non Grata “불가항력”

자동차 사고 후 의식을 잃고 세계가 매우 가까이 보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꼼짝할 수 없고 깨진 유리는 별들의 은하 세계가 되고 이것은 내 아마도 조각났을 신체와 큰 간극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만이 신체와 대상들을 떠돌며 점점 흐릿해져 갈 때 이러한 말의 낭독은 반복되며 하나의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 대위법적 혼돈의 층위를 덧씌운다.

자동차는 무대 중앙에서 계속 돌고 연기를 뱉어내기 시작하더니 차를 부수는 행위가 격렬한 액션의 연쇄 고리를 앞에 사람을 보고 선행 학습하는 동시에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혼합된 어떤 동기의식에 가닿은 몇몇 사람의 행위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별히 권하지 않아도 차를 부수는 행위는 매우 자발적이고 적극적이고 또 폭력적으로 보인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이 묘연해지는 사람의 의식의 한 가운데서 어떻게 문명으로 상정되는 차를 부수는 행위는 일어나는 것일까 마지막에는 그 차를 전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명쾌하게 타를 엎어 버린다.

우리가 부순 것은 과연 자동차뿐이었을까.

목소리-텍스트와의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이 상황, 아니 목소리-텍스트는 하나의 사운드로 맴돌고 기타 소리는 현의 공명을 에너지로 끌어올리며 이러한 행위들을 모두 작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일상은 곧 예술로 들어와 버리는 순간을 겪는 것이다.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58 Anth-e-nada(작품 포커스)


삶의 가상이 실재로 화하는 순간


 엎드려서 가는 투명한 천을 뒤집어쓰고 기어 나와 가에 놓여 있는 상자로 들어가 안에서 하얀 수조 안에 들어가 고개를 든다. 신체가 반사하는 빛은 뿌옇고 불투명하면서 투명하게 신체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는 원이 됐다 신체로 육박하다 동그란 점으로 다시 나타난다. 손이 검은 실체로 다가왔다 조명이 꺼지자 갇힌 신체의 실재성이 드러나고, 다시 조명이 밝혀지자 신체가 그에 파묻혀 있음을 인지케 하는 숨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전이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녀의 내면으로 확장되어 그 위에 가닿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다시 나타난 여자는 몸을 수그리고 명상에 젖고, 드디어 그것이 경계선상에 놓인 어떤 매개의 접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갇히도록 만든 공간으로 전유되게 된다. 위에서 비추는 조명은 뒤돌아 있는 신체를 쓰다듬고 검은 형체와 함께 이중으로 그림자가 비친다.

 방의 유리는 사방으로 확대되고, 실체로 드러나는데 정면을 돌았을 때 움직임이 만드는 궤적이 페인팅과 같은 흔적을 남기게 되고, 온전히 신체가 드러남으로써 그 경계 프레임은 이제 사라진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 투명한 것이 빛을 만나며 그림자를 남길 때 외에는 어느 순간 경계는 무화되는 것으로, 거기에 다시 여자의 파란 물방울이 끊임없이 기포를 일으키며 올라가는 것이다. 신체에 덮이며 빛은 퍼지고, 햇빛과 동물의 표피․세포․바이러스가 마구 요동치며 그 속으로 들어가는 시점의 운동성이 화면에 기입된다. 이상한 유희적인 흥얼거림 이후 영상이 꺼지자 유리에 대고 ‘호’ 불며 그 속의 공기가 많지 않은 절박한 느낌과 답답함을 준다.
 과실 같은 것의 영상이 겹치고 그것이 꺼지고 돌며 몸을 뒤척인다. 이와 같은 영상의 알 수 없는 출현의 배경은 세계를 확장시키거나 미시적 세계의 일면에 들어가는 신체가 하나의 접속망이 되고, 이후 신체만이 남아 공허와 적막을 전유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흰 천을 온 몸에 칭칭 감아 그 안에서 둘러싸이며 끝난다. 이는 처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곳으로의 회귀, 곧 연약한 막을 거치고 단단한 벽에 갇혀 방향을 잡거나 앞을 향하지 못하여 빛이 차단된 동굴과 같은 심상의 장소에서 소멸되고, 시작의 어스름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오히려 삶의 실재성을 가상성으로 치환하게 된다.
 
전쟁의 현실을 전유하는 토탈 퍼포먼스


 야광의 가면은 얼굴이 되어 끄덕거린다. 한 명씩 탑처럼 쌓아올려지고, 사운드의 증폭과 소거에 맞춰 사람들의 움직임은 한 명씩 궤적을 그리면서 하나로 모아지게 된다. 팔을 모으고 양분되게 펼쳐 오르락내리락한다. 계속해서 분절된 행동을 선보이고 진영을 다시 재편하며 집단적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난 뒤에 뭉쳐서 하나로 움직이다 퍼진다. 도깨비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는 이들은 극적인 미를 살리며 하나로 뭉쳤다 음악 그치면 다시 와해된다. 하나의 극적 환경의 구축 이후, ‘이 속담을 해석하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동화 내지 신화적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동시에 ‘당신들이 잘되길 바랐습니다. 사악함과 증오로…… 칼날로 목을 베되 갚음을 해주어야겠습니다.’ 같은 의도적 폭력의 상관 고리를 재창하여 본론에 접어든다.
 어린 아이들은 어머니 모습을 흉내 내며 전유하고, 사회 일련의 현상들을 트집을 잡아내고 자각하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소위 기표들의 놀음은 사회적 의미에 속하면서 다시 미끄러진다. 생각나는 단어들이 초현실주의적 배치를 이루고, 그 뉴스의 뉘앙스를 띠거나 하며 사건들의 배치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진다.


 군인이 소녀를 납치하여 데리고 가는 동시에 핏빛 성찬에서 꿈틀대는 움직임과 동화의 생명력을 상정하는 사운드가 나온다. 여자는 관객석으로 소멸하고, 갑작스레 등장한 여자들은 테이블보를 천으로 닦고, 히틀러 문양이 새겨진 테이블보를 펼쳐 접는다. 시선은 영상으로 옮겨지고 담배를 피우면서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이 둘은 사람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만드는 3S정책 시절에 대한 얘기 등을 나누며 사회적인 의미를 전용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친다. 채팅의 문장으로 납치된 아이의 상황을 글로만 보여주며 소리를 전용한다. 접시를 놓고 다시 거두고 접시와 빠져나가려는 소리가 병치되어 묘한 상관관계를 이룬다.

 어설픈 전유는 별 의미를 담지 않는 사건들의 재현으로, 가볍지만 그 의미는 가볍지 않음 음에서 어떤 식으로 현실이 소비되는지, 이미지의 복제와 가상성으로서 구성된 현실의 전 세계적 경향의 심각성을 오히려 생각하게끔 한다. 피아노를 치고 드로잉을 하고 바이올린 내지 첼로를 켜는 것의 기표로써 캔버스를 누빈다.


 ‘전쟁 체제는 각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독립적인 체제로, 전쟁이 없으면 합법성에 문제가 생기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 정권은 와해되는 것이 진리로 증명되며 개인의 이익의 팽창이자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전쟁’(「전쟁은 사랑이다」), 화면에 놓인 포크는 여유작작한 정서적 흐름의 위협을 형성하고 동시에 그것을 막으며 경계와 경계 안의 구속과 지배를 구현한다.
 군인은 누워서 무기력하게 몸을 부스럭거리고 앞선 군인의 성적 폭력을 치환시키는 가운데 익명의 누군가에 가하는 위협과 공포, 적의 상정을 은유하는 군인으로서 영상을 입고 육이오 때의 군인의 몸을 전유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천에 피를 뿌리고 잘라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찾은 사람은 번민할 것이며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곧 실재계를 마주할 때 가상에 도취되어 현실을 망각할 수 없음을, 하지만 종속된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결단을 내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배우들은 지시 받은 것을 그대로 지키며 구현하는 상태에서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문화적 누층이 배어 나오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전유의 어색한 연기로 나타난다.

존재의 변주 : 변이와 복제의 욕망


 예전 1900년대 초 배경 흑백 사진들, 말 그대로 이국적인 장면의 사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빨리 사진들이 바뀌고 화면을 컬러를 입고, 현대로 넘어온다. 점층적으로 쌓이는 사진들은 도시의 속도와 수많은 사건들의 궤적과 맞물리며 속도가 빨라진다.

 Edwige Mandrou는 관객과 화면의 중간에서 거울 앞(카메라)을 보되, 화면에 투영되는 바는 그녀의 얼굴이 데칼코마니처럼 두 개로 갈리고 다시 두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며 화면 중앙으로 얼굴이 사라지는 과정의 반복적 출현이다.
 화장과 분장 등을 중간 중간 가하고 가깝고 멀게 위치하며 얼굴의 각도를 기울이고 펴고 하는 것의 조절을 카메라로 중계함으로써 눈코입이 붙은 원숭이에서 이마 궤적이 큰 프랑켄슈타인으로, 다시 코가 작은 해골로 얼굴이 달라지는 여러 방식이 새로운 얼굴들의 재출현을 구현한다. 이는 이질적인 모습으로 관객 자신이 생각한 심상에 겹쳐지기도 한다. 일종의 이미지 병치 기법이 적용되는 가운데, 두 얼굴로 나뉘거나 눈코입이 하나인 얼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괴물 얼굴들이 분절되고 조합되는 것은 다양한 형태의 출현이지만, 크게 보면 온전한 신체가 됐다 갈라지는 것과 두 신체가 갈렸다가 붙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두 개의 동형 신체는 갈리면서도 그 형체를 유지하며 오히려 분절 신체로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구가한다.

 화면에는 사회 현상들이 흩날리고 뉴스의 소리가 배경 사운드로 깔린 상태에서 맥놀이를 이루는 어릴 적 거울을 갖고 하는 놀이로서 ‘얼굴 변형’의 욕망의 전이와 다른 것이 되는 것의 ‘변신의 유희’는 성형이라는 것이 어쩌면 전혀 다른 욕망에서 출현하는 것일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화장을 하는 것 역시 다른 캐릭터가 되는 것으로, 고정된 실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 치환해 볼 수 있다.

 화면에서 벗어나 쇼걸의 인위적인 마스크를 쓰고 춤을 춤은 다른 인간으로 변모한 것을 드러낸다. 간단한 비트의 전자음악을 전유하며 화면에는 반동력 있는 탱탱한 줄이 그 탄력의 성질을 잠재한 가운데 줄의 흔들리는 움직임이 음악에 맞춰지고 그것을 머금고 서서 이미지와 사운드를 점점 일치시킨다. 작가는 춤에서 박수를 유도하기 시작하고, 이내 모래에 머리를 거칠게 파묻는다. 이는 타조가 두려움에 떨 때 자신의 머리를 모레에 처박는 데서 온 표현으로, 정치가가 위선적인 행동할 때를 비유하는 정치에 관한 프랑스의 문화적 표현이다.


 빛을 내며 유동하며 움직이는 헬기 소리가 나고, ‘퍼포먼스 여기’라고 쓰인 쇼핑백을 앞에 두고, 그것의 치열하고 단단한 몸의 긴장을 내재한 퍼포먼스로써 수행의 지점을 낳는다. 이는 엄밀히 비도덕적인 행동과는 다른 차원이다. 전쟁의 상황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의 상징적 의미 외에 실은 그것이 긴장을 유발하는 기제로서, 맥놀이를 구현하기 위한 소품인 것이다.

 퍼포먼스는 박수를 유도하는 움직임으로 변해가다 극장 기둥으로 오르고 우리나라 말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나서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생일 축하합니다! Korea"하며 경제적 파워에 따라 잘라진 빵들을 관객들에게 건네며 퍼포먼스 장을 후속적인 의식의 움직임으로 퍼뜨린다.

일렉트로닉 핑퐁 : 탁구와 미디어의 접합

 일명 컵으로 하는 탁구 경기는 화면에 매개되고, 유리잔으로 치고 진 사람이 술을 마신다. 사람들이 탁구대로 삼는 판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그 안에서 공이 화면과 출현한다. 컵과 사람은 실재이고, 가상공간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화면에 부감 쇼트로 비칠 때 사람은 드러나지 않고 화면에 밀착되어 움직이는 유리잔이 실체로, 그리고 경계선에 맞을 때 나는 마찰․충격 등이 색으로 나타난다.

 게임의 쾌락은 묘하게 가상이 실체에 자리 잡는 어느 순간에 있다. 탁구공의 소리가 잔의 소리로 치환되어 울려 퍼질 때, 유리잔으로 공을 넘겨 부딪칠 때 매개되어 나오는 소리는 비가시적인 어떤 회로를 상정하고, 여기에 더해 잔을 치며 전자음이 섞이는 연주를 하게 된다. 화면 안에 움직이는 것은 실체에 의해 매개되고 전이되며 잔을 프레임에 놓을 때마다 그것이 반짝거리며 화면에서 퍼져나간다. 그리고 잔을 놓았던 곳에 잔상이 일며 공의 움직임의 분절되어 번져나가는 것으로, 빛과 파동이 거기서부터 그려지고 생성되는 것이다.

전자 악기들의 향연


 얼굴까지 연결된 색색이 변하며 반짝이는 모자를 쓰고, 로봇 같은 신체로 등장, 역시 빛이 나는 흡입하는 반주의 디저리두를 불고, 리듬을 타는 남자의 팔 위에 키보드를 조작함은 곧 흐르는 빛들을 조절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태평소를 불어제치고 디저리두도 흥을 돋운다. 분절되는 연주 방식의 소리는 빠른 단속적 움직임에 조응하는 결과로서, 소위 ‘전자 디저리두’ 연주를 유투브 방송에 올렸을 때 미국에서는 ‘세계 전자 모기’라는 반응이 왔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타악기와 IT와 접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었다고 했다. 이어 ‘멀티 드럼’, ‘일렉트로닉 기타’, ‘일렉트로닉 장구’가 만난다. 


 모듬북 형태의 멀티 드럼은 북의 연주 기법으로 살려내고, 소리는 크게 증폭되고 확대되도록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장구는 더 섬세하고 정교하게 거세게 몰아붙인다.
 악기들은 서로 파고들며 조응하고, 앙코르로 「아리랑」이 연주됐고, 치닫는 진폭의 치솟는 에너지는 치열한 수행의 결과물로, 경쾌함의 무르익음은 몸의 감각을 감싸고도는 열정적인 반응으로 끌어올려진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42 Anth-e-nada(작품 포커스)


 누군가(Peeter Allik)는 색소폰을 불고 어떤 이는 파라솔 테이블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Orion Maxted는 사다리 안에서 다리를 양팔로 들고 정찰하듯 움직이고 전체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동한다. 스타킹으로 만든 토끼 가면을 쓰고 하얗게 온 몸을 분칠하는데, 이는 전날 부토 공연의 영향을 받아 그것의 에너지를 끌어와 변용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바라보며 무대 중앙에 앉아 괴물 같은 인공 마스크를 쓴 두세 명은 관객과 참여자의 중간 단계에 위치해 있다.
 부토 작가들도 함께 하며 사토 유키에의 사운드가 탁자를 치는 것을 반복하는 맥놀이로 계속되는 가운데 풀을 머리에 끼고 풀을 들고 이동하기도 한다. 사운드가 확장되며 의식에 미치자 모두 함께 무언가를 치고, 소리를 내며 에너지를 소리로 치환시킨다. 이른바 적당한 주파수의 위치를 찾다 순식간에 층위들의 경계를 넘는, 행위의 파장이 주술적 의식을 치르는 것에 연결되는 것이다.

 검은 옷의 하얀 뇌를 뒤집어 쓴 Al Paldork을 붙잡고 팔을 양쪽에서 잡고 끌고 온다. 그를 에워싸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에 기댄다. 어떻게 같이 모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존재를 실체화된 개별 주체로 생각지 않는 데서 해독될 수 있다. 즉 에너지들이 각기 분절되어 떨어져 다니며 이는 하나의 주체로서 독립적인 조직을 이루지 못한다. 에너지의 붙고 떨어짐, 접합과 분절은 유기적인 흐름 하에 얻어지는 것이며 개인의 인식은 상대방의 신체와 연결된다. 이로써 하나의 신체는 하나의 독립된 신체가 아닌 공간 안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하며 그룹을 짓는 것은 서로의 의식을 매개하며 하나의 에너지화되는 하나의 동화된 신체로서 의식들을 치루기 위해 존재케 되고, 이는 집단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개인적 움직임은 그다지 크지 않고 조심스러우며 음악의 리듬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누군가 큰 신호를 발산할 때 이는 하나의 의식의 초점을 이루는 전환의 지점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약속하지 않음으로서의 즉흥이 작용하는 방식은 약속의 신호가 작동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는 인간이 타인을 의식하고 용인하는 사회의 한 방식을 치환하는 것에 가깝다.
 처음도 끝도 없는 퍼포먼스에서 사운드의 시작 지점과 끝나는 지점은 그것이 음악과 함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순간으로, 그 매듭이 느슨해지는 어느 한 지점은 음악도 함께 내려앉으며 결말을 부르는 순간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35 Anth-e-nada(작품 포커스)


 고명숙의 잔잔한 곡 「아리랑」으로 시작, 내지르는 큰 진동의 떨림의 파열하는 에너지를 내포한 목소리가 아날로그적 향기를 품고 흘러온다.


 스윙체어는 퍼커션과 기타가 하나로 구축되어 힘이 있다. 급 멜로디를 변모해서 사운드가 풍성해지고, 순수한 감성을 안고 간다. ‘my melody 너만을 위한 my melody~’, 다양한 목소리가 감미롭게 묻어난다. ‘너를 보고 있으면 숨기지 마라 숨이 차게 떨려와 어제도 오늘도 내일을 위해서 날아올라’라는 「한류스타」가 마치 청명한 하늘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봉규의 장구는 몸 뒤틀면서 등장하고, 마구 땅에 누워 팔다리를 허우적대고 흐느적댄다.  온 몸을 비비꼬며 팔을 위로 뻗치고 사운드에 몸을 맡기고 자유롭게 노닌다. 그 에너지에 취해 즉흥 방식, 그것이 그렇게 어렵거나 특이한 방법론 계열이 적용되는 것이 아닌, 음악의 에너지를 전유하는 것 자체로 음악에 일체화되고 그것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문고의 오현아, 기타 노이즈사운드, 부토가 일제히 끼어든다. 젖줄의 생명력을 지닌 영토에 마음껏 내놓으며 벗어젖히며 남성의 쾌활한 에너지를 뿜으며 노닌다. 뇌쇄적인 마력에 가닿으며 반면 죽어있음으로 그 마른 남자는 꼿꼿하게 그것을 뭉개고 흩트리면서 사실상 문화적 기억에 따라 기생의 기표를 상정한다. 그것이 부토의 춤으로 제시될 때 언캐니보다 몸의 소비, 몸의 전시적 측면의 두드러짐이 강했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카메라의 시선을 완전히 소비하며 자신의 독무대로 무대를 가져갔다.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새로운 변이와 전용, 기다림에 가까운 머무름이 빚어질 뿐이다. 음악 역시 장구의 계속된 반주에 노이즈 사운드가 뒤섞이는 맥놀이 속에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끊임없는 파열 끝에 다시 덧입혀지는 표면의 누층이 노닐 뿐이다. 
  체를 덮고 침입하며 접속하는 일련의 신체에 의한 신체의 매개는 끈적끈적한 움직임을 분사하며 덩어리진 신체를 만든다. 죽음이 달라붙는 방식은 신체를 다시 되살리며 죽음으로서 삶을 분사한다. 기묘한 관계항은 접합과 집합의 끌림과 그로써 결말을 맞는 과정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26 Anth-e-nada(작품 포커스)

Kinki Iori

 면면히 흐르는 기의 유동한 흐름, 명상적인 세례를 퍼붓는 음악에 하얗게 분칠한 무표정한 얼굴로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 붉은색 조명이 핏빛으로 완전 깔리고 두 손을 위로 들고 핏덩어리 육신으로 변한다.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오고 다른 층위로 트랜스된다. 일본의 문화적 누층이 표피적으로 증발되며 묘한 분위기를 남기고 이해되거나 해독될 수 없는 텍스트 층위에 맞춰 이의 정서는 감지되기 어렵다.
 문화적 누층은 그것과 조응되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 그의 몸을 타고 나오기보다는 문화적 소비를 이룬다. 무엇보다 에너지를 어떻게 갈무리하고 펼쳐내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팔을 펼치며 얼굴에 인상을 쓰고 정면을 응시한다. 무언가를 인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관계 맺음이 아닌 죽음의 신체를 증여하는 방식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가깝다.
 
Tochikawa Kyo


 씨어터제로 극장의 벽에 두 다리를 올리고 나자빠지는, 온 몸의 긴장과 에너지를 유동하는 신체의 구불거림에 발산하는 공기는 에너지의 흐름에 맞닿아 전이되며 서서히 뻗쳐가고 또 멈추며 그것을 끌어오는, 곧 환경과 단단히 결부된 움직임은 의식의 확장이 세상에의 접속 내지 흩어짐을 통해 무화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클래식이 나오고 팔을 올리고 가슴으로 끌어안다 내린다. 강한 긴장이 발을 벌리며 가는데 미친다. 클래식의 에너지에 격정적으로 팔과 다리를 놀린다. 그 음악 자장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곧 그것의 멜로디가 일으키는 정서와 리듬의 단위에 호흡은 미세한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개를 뒤로 젖혀 썩은 입의 천장을 보여준다. 숨을 턱턱 내쉬며 힘겹게 간다. 클래식을 전유하는 몸짓은 그로테스크하게 나타난다. 팔을 젓고 자유롭게 움직임을 구가한다. 숨을 몰아쉬며 기괴함 이전에 생명의 약동임을 드러내는 기제를 적용한다. 음악의 전유가 건조한 틈을 타 그것의 빠르기에 대한 반발적 작용으로 움직임의 리듬이 변이됨은 차라리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기보다 호흡의 거세짐을 가리키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대무용의 몸짓에 가깝다. 거기서 문득 입을 벌려 죽음의 기표를 생성할 때 균형의 지점이 깨지게 된다.


 Fujieda Mushimaru
는 아들과 함께 등장, 개울 소리가 들리는 자연에서부터 출발, 그는 깊은 명상에, 시름에, 또는 죽음에 잠기지만 아들은 철없이 논다. 그는 삶을 자각할 수 있거나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아이는 그저 자유롭게 세상을 구가한다. 개울이 흐르고 몸이 씻겨 내려간다. 만져질 듯 촉각적 전이를 일으키는 아스라한 더듬음으로 시각을 장식한다. 아이의 몸을 더듬어가듯 내지르는 아련한 손길은 애타는 부정의 보이지 않는 역설로 고양된다. 아이를 등 뒤에 업고 한 바퀴 돌며 재출현하는 그의 움직임에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환경에서의 실존적 층위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이가 극장의 기둥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그는 비로소 격렬하게 움직임을 더듬어가고 충동적인 몸의 에너지를 체현하며 몸을 꺾고 흐트러뜨리고 펼쳐놓기 시작한다. 붉게 물든 조명은 자연의 알레고리 하에서 석양을 상정하는 듯하고 빨간색을 입고 그는 또 다른 층위로 건너뛰어 의식을 전환하고 아들에게로 간다. 같이 오르고 그는 기둥에서 흐느적거린다. 내재된 리듬 층위에 침잠해 들어가는 과정과 자연을 적응하며 맞서는 현실적 층위가 교차되어 스펙터클한 광활함의 미학과 내면의 집중을 통해 내재된 리듬의 재발견을 통해 미세한 감정 층위들을 석어낸다.


 ‘복숭아꽃 살구꽃……’, 노래에 맞춰 서승아는 노인의 몸을 현시하며 걸어온다. 세월을 스프링처럼 튕기면서 삶과 죽음 층위의 경계선상에서 자유롭고도 거대한 궤적을 꾀고, 그것은 결코 결기 있게 무겁지 않고 오히려 가볍다. 다만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느낌으로, 이는 죽음의 무게, 죽음의 덩어리진 기억들에 가까울 듯하다.
 그것들을 더디게 벗어놓고 손가락까지 미치는 팔의 전율을 신체로 확장해 의식을 마구 흩뿌리며 왔다 갔다 한다. 마치 무당의 굿을 보듯 끊임없는 돌아감으로서의 반복이자 격렬한 떨림을 보여준다. 이는 몸의 관성적 돌아감의 측면도 수반한다. 그런 움직임 속에 이미 삶은 약동하기 시작하고, 멈춰 앞을 인식하며 숨을 내몰아 쉴 때 자각하는 것은 삶이고 또 죽음 층위에 직면한 자신이다.


 마치 예전 뽕짝 같은 음악에 맞춰 그녀는 풀잎을 손으로 내가리듯 하고 다시 내려 허벅지를 치는 동작을 반복한다. 전체적으로 계속된 반복의 관성적인 움직임으로의 승화가 주효하게 작용한다. 의식을 무화시키는 것 자체를 인식하게 하는 죽음 층위의 신체는 음악을 색다르게 전유한다. 음악에 맞추는 것으로, 음악에서부터 출발하기보다 장구에 진동 기길 반동을 준다. 사토 유키에의 장난감 악기는 ‘챙챙챙’, 공허한 적막을 만드는 울려 퍼지는 충격으로 파열되고, 장구의 실재에 이봉교는 구음을 넣자 리듬은 유동하기 시작한다. ‘챙’, 심연을 후벼 파는 자국, 다른 층위 표면을 투박하게 긁는,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 사운드는 죽은 신체를 부르는 게 아니라 먼저 어떤 하나의 신호로서 등장한다.

 음악에 조응하기도 하고 죽은 신체의 얼굴을 띠고 유령처럼 배회하고, 휘몰아대는 소리의 에너지에 주체하지 못하는 몸의 흐느적거림을 구현하게 된다. 막 뒹굴기도 하고 난잡한 판 의 사운드를 전이하기보다 사운드에 중독‧마취되어 가는, 그것이 덧입혀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음악에 다가서는 것은 하나의 실체로 그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타악의 흥겨움에 제대로 몸을 싣지 못한 채 음악에 끼어 있고, 그것이 기괴한 신체의 현존을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흐름 하에 가져가게 한다.

 Fujieda Mushimaru는 또한 아이와 딱 붙어 춤을 춘다. 아이가 그에 부착되고 기입되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가 무얼 하건 그에 달라붙는 것이다. 또한 그 달라붙음에도 그는 그것을 떼어 내지 않고 하나로 연결한 상태에서 움직임을 더디게 수행한다. 몸을 모두 같이 붙여 다리를 올리고 떨기도 하고 누워 몸을 느리게 하여 더미를 이룬다.
 이러한 더미는 집단적인 조화를 이루기보다 덩어리 육신을 나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특정한 의미를 형성하거나 관계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의식적인 게 아니라 단지 무의식적 접착이다. 조명이 밝혀지고 하얀 몸을 비틀고 더듬고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몸을 전시하는 그는 익살스럽거나 망령이 난 늙은이와 같이 묘한 웃음을 디고 몸을 뒤척거린다.


 집단적인 묶임은 역시 하나의 전시하는 신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달되며 죽음에서 벗어나 죽음의 표피만을 기입하는 클리셰로 하나의 충동적 소산에 다름 아니다. 조명의 색이 계속 바뀌고 신체에 덧입혀진다. 이미 음악과의 구분은 없고 음악 역시 존재치 않는다. 리듬과 가파름은 모두 유동하는 신체로 화해 있다. 음악적 메아리는 춤의 파동으로 전유되며 둘이 일으키는 에너지는 하나로 승화해 하나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부재하는 방식으로서 분출의 조합과 충돌이 구현되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15 Anth-e-nada(작품 포커스)


국가 교역이 성립하는 과정의 환치


 Kirils Pantelejevs는 하얀 컵과 붉은 컵을 오가며 푸른색 통으로 물을 담아 옮기는 등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국가와 국가 간의 교역이 어떤 식으로 성립하는지 등을 아주 단순화한 알레고리 차원에서 보여준다. 물과 물이 다르지 않듯 그것은 가늠키 힘든 양적 차이의 결과만을 보여줄 뿐이며 물결의 파동이 갖는 실체적 은유가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 무엇보다 삶은 획정되지 않으며 국가, 그것이 하나의 타자로서 삶을 매개하고 수행하는 방식으로 다가올 수 있음까지 생각하게 한다.

죽음으로써 이루는 자연의 전유


 Ronaldo Ruiz는 새장을 얼굴에 씌우고 천천히 움직여 사다리에 올라가서 새장을 건다. 맹꽁이 소리 나며 자연을 전유하는 새의 상징물을 그 안에 걸고, 휘어진 나뭇가지에 깃발을 끼워 나뭇가지 끄트머리를 잡고 사다리에 올라가 흔들어 자연의 환경을 구축한다. 비닐을 깔고 나뭇가지 묶음을 비닐 안에 넣고, 테이프로 묶고 줄에 묶어둔다. 사람들을 향해 토마토를 던지는데, 기실 인간의 환경, 곧 나무를 뒤덮은 도시의 인공적 환경에, 서교예술실험센터를 벗어나는 빌딩건물에 던지는 것과 같다.
 호스를 입에 물고 목에 칭칭 감아 커피 잔 풀장에 들어간다. 물을 틀어 자신의 입에서 물이 새어나오게 하고, 머리를 담갔다 한참 있다 뺀다. 자신의 목을 졸라 죽음의 알레고리를 자연과 연결시키며 문명을 해체한다.

성매매가 성립하는 방식
 


 강성국은 검은 망사스타킹에 연둣빛 가발을 쓰고 다리 꼬고 브래지어 보여줄 듯 말 듯 자신의 가격 표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싸다고 한다. 창녀를 전유하는 작가는 담배를 피우고, 입에 문 채 온 몸을 뻗쳐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등장하여 상의를 벗고 관객 모두에게 성을 제공하려는 의사를 기꺼이 내비친다. 머뭇거림의 행동, 더딘 움직임, 천천히 감에 시간의 층차를 혼란스레 가져가며 사유할 생각들을 부여한다. 김백기 감독의 손을 잡고 가슴께 손을 넣어서 만지도록 하며 성적 코드의 소비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그것에서 방관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실재적인 전유의 과정으로 보여준다. 창녀는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관객 앞으로 현현되는 것에 가깝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03 Anth-e-nada(작품 포커스)


 고명숙의 기타에 맞춰 구성지게 흘러나오는, 정답게 고향 전원의 느낌으로 보듬고 어루만지는 목소리, ‘얄리얄리 얄랑셩’ 구성지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의 강물 같은 리듬.
 모든 것은 무상하게 흐르고, 집착도 허영도 미련 없이 지우고 버리는 삶의 철학을 제시한다. 그 기가 꽤 세다. 잔잔하게 한 곡조 연주 젖어드는데, 여기에 이봉교의 장구가 가세한다. 거칠게 공간에 퍼지고, 사람들은 막 춤을 추며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간다.


 김광석의 기타를 치는 손목과 팔의 힘이 많이 들어가 단단하게 기타와 연결된다. ‘챙’ 어떤 소리 격렬하게 휘몰아 닥치는 사운드 자체가 파열하며 트랜스하는 사운드가 부족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기타의 존재를 천둥 같은 에너지가 잠재하는 것으로 새롭게 치환시킨다. 하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악기로 다루며 거의 어떤 곡임을 상정하지도 않고 자유롭게 연주한다. 기타의 쿵쾅거리며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한다.


 장구 치는 이봉교는 축문을 외듯 지명들을 담아 글과 같이 선형적이지 않고 고유명사들이 섞인 본래적 의미의 기표들을 크게 의식 않고 뱉어낸다. 만약 외국인들이 그 단어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것은 전체적인 웅얼거림 같은, 뱅글뱅글 돌아가는 리듬 속에 있어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말 그대로 기표의 유희라고 말하며 대답을 회피하는 게 나을 것이다.


 사토 유키에의 힘 있는 목소리는 울림이 좋고 점점 무대는 무르익어감이 느껴진다. 에너지는 온 무대를 파고들고,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세 곡을 부르고 나서 세레모니까지 ‘감사합니다.’ 길게 끌며 관객의 반응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에너지까지 자유롭게 연주한다고나 할까. 그는 무대장악력이 뛰어나다.

죄와 구원 사이에서


 Erik Hokanson은 한 명씩 관객을 끌고 와 ‘pride’ 등 일곱 가지 죄를 새긴다. 순서가 정해지거나 관객 한 명 한 명이 연결되어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단지 일곱을 채운다는 의미에 가깝다. 줄로 관객을 묶고 담배를 물려준다. 신체 일부, 특히 배에 죄를 뜻하는 글자들을 새기는데, 원피스 등의 옷을 입어 피치 못할 때 다른 부위에 새긴다. 이는 절대적인 낙인과 같은 육화의 일부다. 동시에 다른 관객 한 명이 퍼포머로, 무대 바깥에서 돌아다니며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술을 먹여주고 레몬을 빨아먹는 모종의 미션이 실천되고 있는 듯 보인다.
 퍼포먼스는 묶인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음악을 즐기는 퇴폐적인 분위기에서 형벌의 무게는 증발되며 분산되는 시선과 조각나는 시간들 속에 치러지는 제의식 같은 것에 가깝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배에 ‘god’, 신이라고 쓴다. 그리고 호령하듯 자신의 배를 가리키고 분위기를 장악한다. 이로써 신의 권위와 지위를 갖고 성과 속을 이야기한다. 죄와 선물. 죄로 인한 벌과 줄을 풀어줌으로써 얻는 구원으로서 선물, 남자와 여자, 구속과 유희 등 평소 그가 상정하는 무대로서 구역을 신체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더 너른 벌판으로서 클럽은 그렇게 한 쪽에서는 춤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는 일군의 구속된 사람들과 그것을 보며 음악에 몸을 흔들어 대는 일군의 사람들이 대립적인 구도를 이루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3:56 Anth-e-nada(작품 포커스)


 처음 간략한 소개 멘트와 같이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소셜 네트워크 툴이나 온라인 툴들로 서로의 예술을 표현’하고 네트워크하는 시점에서 네이트온이나 스카이프 등을 중계 매체로 활용하여 펼쳐지는 릴레이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배우이자 무용수인 아티스트 전수진은 무표정한 얼굴에 위태하게 서서 천천히 유동하며 움직였다. 유동하는 신체의 언캐니에 이르지는 않지만, 신비스러운 층위에서 의식은 심연에 있되 구불구불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오며 외파되는 모습을 보였다.


 즉흥성을 살려 충주 건국대에서 학생 두 명은 앞의 공연을 레코딩해서 다시 영상으로 만들어서 상영하는 미션을 계획하고 있었고, 일단 실시간 퍼포먼스로 ‘깐풍기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네’의 비트 강하고 가사가 인상적인 랩과 노래를 펼침을 영상으로 중계하는데, 중간에 화면이 끊기기도 하는 단속적 출현, 모자이크식 색감으로 독특한 영상의 결이 만들어진다.


 John Bonafede의 「For Those Who Were Silenced Before Me」 역시 아프리카 방송으로 송출되는 라이브 퍼포먼스로 펼쳐졌다. 좁은 감방을 상정하고, 수갑을 채운 죄수를 심문하며 욕조 속에 머리를 담갔다 뺐다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동시에 죄수에게 난센스 질문을 던져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케 만드는 아이러니를 다룬다. 물에 얼굴이 잠기는 죄수 Bonafede에게 가해지는 심문 행위 동안에 또 다른 죄수의 피아노가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고, 결과적으로 Bonafede가 실신하게 되는, 몸을 통해 나타나는 수행적 지점을 극명하고도 극적으로 다루며 정치적인 풍자를 적나라하게 관철시킨다. 
 

 흰색 옷을 입은 성백 작가는 부산에서 자신의 행위를 중계하는데, 의자 하나를 옆에 두고, 흙을 얼굴에 파묻고, 흙을 입에 머금고 흰 의자에 가서 뱉는 행위를 반복한다. 흰 꽃을 들고 와서 흙에 심고, 꽃을 손으로 가리킨다. 물을 머금고 돌아와서 뱉어 식물에게 물을 선사한다. 이는 자연에 기꺼이 기의하는 과정이며 인간 중심의 평화가 아닌 희생의 무른 영토를 시간의 궤적으로 서서히 다듬는 수행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중계하는 화면의 입자는 유동적인 층위 행위를 획정 짓는 데 불안정한 수행 지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연속되지 않음이 불현듯 나타나는 화면의 멈춤 현상에서 의식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재현되지 않는 현재에 대한 실재의 귀환으로서 과거가 출현하고, 과거의 일부분으로서 내지는 현재의 공백으로서 단절된 현재는 실재를 좇고 매개하는 카메라와의 더욱 공고한 관계를 가져가게 된다. 그 부유하는 영상은 마치 그것을 기억의 한 자취에서 현현되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실재가 전하지 못하는 것을 실재를 재매개하는 카메라에 의해 수용하는 신체의 감각이 재편되는 현상이 인다.
 원활하게 잘 작동이 안 되는 편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상대편 쪽에서 이쪽의 관객들을 수반한 무대의 반응이 잘 매개가 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보를 취하고 수합하는 건 임시적인 퍼포먼스 방송국을 차린 이곳에서 가능하고, 정보는 상대적이고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취해지지만, 선택과 확장은 자유롭다.


 ‘탕타당’, 둔탁하게 철판 같은 것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종이를 크게 깔고, 거기에 Amadeo Peñalver는 페인팅 드로잉을 한다. 실제 매우 약동하는 움직임에 거칠게 물감을 흩뿌리며 흔적들이 어지러이 덧입혀지는 것이지만, 이는 단속적 영상의 송출로 인해 중간 중간 변화의 궤적을 입은 다른 이미지들 삽입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신체는 하나의 덩어리와 같이 색색의 물감과 궤를 이뤄 위치한다. 그는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하나의 끈을 등에 연결해서 유동하는 신체로 표면과의 부딪침을 온 몸의 신체에 전달되는 떨림에 의해 붓으로서, 확장된 신체의 궤적을 종이와의 접촉을 통한 신체드로잉으로 치환시키며 점차 고깃덩어리 신체로 변모되어 간다.
 바닥은 완전히 빨갛게 칠해지고, 확장된 신체는 지배할 수 없는 신체로써 붉게 바닥을 만들고, 계속 의식을 때리는 반복되는 음향의 압박 속에 실재와의 마찰은 몸에 기록되는 흔적으로, 바닥은 하나의 신체 표면으로, 신체는 그 속에 융해되는 것이다.


 한 명의 배우는 계속 누워 있다. 엎드려서 손을 위로 뻗치고 심호흡을 하며 의식의 작은 물꼬를 튼다. 사운드가 강하게 증기를 뿜으며 나오는 그 안에 파묻혀 생각들은 회오리치며  회상된다. 의자에 앉고 세 개의 화면이 영상을 덮는다. 세 명의 여성이 웹캠을 통해 얼굴을 비춘다. 빛이 나는 물건들로 화면을 채우거나 얼굴을 칠하고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다른 사물들을 비추고 웹캠에 얼굴을 들이미는 식으로 장난을 친다.
 무대의 여자는 지하철을 타듯 손을 흔들고 일상의 장면들을 연출하고 흙을 파고 덮는 시늉, 머리를 묶어 얼굴을 뒤덮는 마임적 행위로 에피소드들의 분절된 나열 이후 유리 접시들을 가져와서 펼쳐 놓고 물감을 뿌린다.

 미디어에 의한 중계 방식은 공연의 질적 판단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어떤 행동들을 연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다른 층위들을 접속하는 미디어의 트랜스한 측면을 자유롭게 구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창, 하나의 층위에서 왔다 갔다 하며 펼쳐지는 시선의 분산은 인지하는 속도에 대한 감각들을 구현하며 실제와 가상을 하나의 창이라는 가상의 층위로 실재를 매개하여 치환시킨다. 여러 레이어를 접속했다 풀었다 다시 접속을 불러오는 접속  의식의 끈은 연결되고 판단하며 구성하는 세계를 상정하고, 클릭이라는 수행은 실재로 영상을 통해 현현시키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