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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한국실험예술제 온라인 웹진 - 곤충의 더듬이나 동물의 촉수를 닮아 있는 안테나는 보통 송수신의 매개 역할을 하는 기구로 생각됩니다. 안테나에서 탄생한 "안테나다"는 "안테나~다!"라는 친근한 외침이자 '안 태나게' 움직이는 전달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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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1. 14:26 Anth-e-nada(작품 포커스)

Kinki Iori

 면면히 흐르는 기의 유동한 흐름, 명상적인 세례를 퍼붓는 음악에 하얗게 분칠한 무표정한 얼굴로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조금씩 내려오고 있다. 붉은색 조명이 핏빛으로 완전 깔리고 두 손을 위로 들고 핏덩어리 육신으로 변한다.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오고 다른 층위로 트랜스된다. 일본의 문화적 누층이 표피적으로 증발되며 묘한 분위기를 남기고 이해되거나 해독될 수 없는 텍스트 층위에 맞춰 이의 정서는 감지되기 어렵다.
 문화적 누층은 그것과 조응되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 그의 몸을 타고 나오기보다는 문화적 소비를 이룬다. 무엇보다 에너지를 어떻게 갈무리하고 펼쳐내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팔을 펼치며 얼굴에 인상을 쓰고 정면을 응시한다. 무언가를 인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관계 맺음이 아닌 죽음의 신체를 증여하는 방식이 조금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가깝다.
 
Tochikawa Kyo


 씨어터제로 극장의 벽에 두 다리를 올리고 나자빠지는, 온 몸의 긴장과 에너지를 유동하는 신체의 구불거림에 발산하는 공기는 에너지의 흐름에 맞닿아 전이되며 서서히 뻗쳐가고 또 멈추며 그것을 끌어오는, 곧 환경과 단단히 결부된 움직임은 의식의 확장이 세상에의 접속 내지 흩어짐을 통해 무화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클래식이 나오고 팔을 올리고 가슴으로 끌어안다 내린다. 강한 긴장이 발을 벌리며 가는데 미친다. 클래식의 에너지에 격정적으로 팔과 다리를 놀린다. 그 음악 자장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곧 그것의 멜로디가 일으키는 정서와 리듬의 단위에 호흡은 미세한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개를 뒤로 젖혀 썩은 입의 천장을 보여준다. 숨을 턱턱 내쉬며 힘겹게 간다. 클래식을 전유하는 몸짓은 그로테스크하게 나타난다. 팔을 젓고 자유롭게 움직임을 구가한다. 숨을 몰아쉬며 기괴함 이전에 생명의 약동임을 드러내는 기제를 적용한다. 음악의 전유가 건조한 틈을 타 그것의 빠르기에 대한 반발적 작용으로 움직임의 리듬이 변이됨은 차라리 정서적 감흥을 일으키기보다 호흡의 거세짐을 가리키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대무용의 몸짓에 가깝다. 거기서 문득 입을 벌려 죽음의 기표를 생성할 때 균형의 지점이 깨지게 된다.


 Fujieda Mushimaru
는 아들과 함께 등장, 개울 소리가 들리는 자연에서부터 출발, 그는 깊은 명상에, 시름에, 또는 죽음에 잠기지만 아들은 철없이 논다. 그는 삶을 자각할 수 있거나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아이는 그저 자유롭게 세상을 구가한다. 개울이 흐르고 몸이 씻겨 내려간다. 만져질 듯 촉각적 전이를 일으키는 아스라한 더듬음으로 시각을 장식한다. 아이의 몸을 더듬어가듯 내지르는 아련한 손길은 애타는 부정의 보이지 않는 역설로 고양된다. 아이를 등 뒤에 업고 한 바퀴 돌며 재출현하는 그의 움직임에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환경에서의 실존적 층위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이가 극장의 기둥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그는 비로소 격렬하게 움직임을 더듬어가고 충동적인 몸의 에너지를 체현하며 몸을 꺾고 흐트러뜨리고 펼쳐놓기 시작한다. 붉게 물든 조명은 자연의 알레고리 하에서 석양을 상정하는 듯하고 빨간색을 입고 그는 또 다른 층위로 건너뛰어 의식을 전환하고 아들에게로 간다. 같이 오르고 그는 기둥에서 흐느적거린다. 내재된 리듬 층위에 침잠해 들어가는 과정과 자연을 적응하며 맞서는 현실적 층위가 교차되어 스펙터클한 광활함의 미학과 내면의 집중을 통해 내재된 리듬의 재발견을 통해 미세한 감정 층위들을 석어낸다.


 ‘복숭아꽃 살구꽃……’, 노래에 맞춰 서승아는 노인의 몸을 현시하며 걸어온다. 세월을 스프링처럼 튕기면서 삶과 죽음 층위의 경계선상에서 자유롭고도 거대한 궤적을 꾀고, 그것은 결코 결기 있게 무겁지 않고 오히려 가볍다. 다만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느낌으로, 이는 죽음의 무게, 죽음의 덩어리진 기억들에 가까울 듯하다.
 그것들을 더디게 벗어놓고 손가락까지 미치는 팔의 전율을 신체로 확장해 의식을 마구 흩뿌리며 왔다 갔다 한다. 마치 무당의 굿을 보듯 끊임없는 돌아감으로서의 반복이자 격렬한 떨림을 보여준다. 이는 몸의 관성적 돌아감의 측면도 수반한다. 그런 움직임 속에 이미 삶은 약동하기 시작하고, 멈춰 앞을 인식하며 숨을 내몰아 쉴 때 자각하는 것은 삶이고 또 죽음 층위에 직면한 자신이다.


 마치 예전 뽕짝 같은 음악에 맞춰 그녀는 풀잎을 손으로 내가리듯 하고 다시 내려 허벅지를 치는 동작을 반복한다. 전체적으로 계속된 반복의 관성적인 움직임으로의 승화가 주효하게 작용한다. 의식을 무화시키는 것 자체를 인식하게 하는 죽음 층위의 신체는 음악을 색다르게 전유한다. 음악에 맞추는 것으로, 음악에서부터 출발하기보다 장구에 진동 기길 반동을 준다. 사토 유키에의 장난감 악기는 ‘챙챙챙’, 공허한 적막을 만드는 울려 퍼지는 충격으로 파열되고, 장구의 실재에 이봉교는 구음을 넣자 리듬은 유동하기 시작한다. ‘챙’, 심연을 후벼 파는 자국, 다른 층위 표면을 투박하게 긁는, 공기를 가르며 나가는 사운드는 죽은 신체를 부르는 게 아니라 먼저 어떤 하나의 신호로서 등장한다.

 음악에 조응하기도 하고 죽은 신체의 얼굴을 띠고 유령처럼 배회하고, 휘몰아대는 소리의 에너지에 주체하지 못하는 몸의 흐느적거림을 구현하게 된다. 막 뒹굴기도 하고 난잡한 판 의 사운드를 전이하기보다 사운드에 중독‧마취되어 가는, 그것이 덧입혀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음악에 다가서는 것은 하나의 실체로 그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타악의 흥겨움에 제대로 몸을 싣지 못한 채 음악에 끼어 있고, 그것이 기괴한 신체의 현존을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흐름 하에 가져가게 한다.

 Fujieda Mushimaru는 또한 아이와 딱 붙어 춤을 춘다. 아이가 그에 부착되고 기입되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가 무얼 하건 그에 달라붙는 것이다. 또한 그 달라붙음에도 그는 그것을 떼어 내지 않고 하나로 연결한 상태에서 움직임을 더디게 수행한다. 몸을 모두 같이 붙여 다리를 올리고 떨기도 하고 누워 몸을 느리게 하여 더미를 이룬다.
 이러한 더미는 집단적인 조화를 이루기보다 덩어리 육신을 나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특정한 의미를 형성하거나 관계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의식적인 게 아니라 단지 무의식적 접착이다. 조명이 밝혀지고 하얀 몸을 비틀고 더듬고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몸을 전시하는 그는 익살스럽거나 망령이 난 늙은이와 같이 묘한 웃음을 디고 몸을 뒤척거린다.


 집단적인 묶임은 역시 하나의 전시하는 신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달되며 죽음에서 벗어나 죽음의 표피만을 기입하는 클리셰로 하나의 충동적 소산에 다름 아니다. 조명의 색이 계속 바뀌고 신체에 덧입혀진다. 이미 음악과의 구분은 없고 음악 역시 존재치 않는다. 리듬과 가파름은 모두 유동하는 신체로 화해 있다. 음악적 메아리는 춤의 파동으로 전유되며 둘이 일으키는 에너지는 하나로 승화해 하나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진다. 부재하는 방식으로서 분출의 조합과 충돌이 구현되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15 Anth-e-nada(작품 포커스)


국가 교역이 성립하는 과정의 환치


 Kirils Pantelejevs는 하얀 컵과 붉은 컵을 오가며 푸른색 통으로 물을 담아 옮기는 등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국가와 국가 간의 교역이 어떤 식으로 성립하는지 등을 아주 단순화한 알레고리 차원에서 보여준다. 물과 물이 다르지 않듯 그것은 가늠키 힘든 양적 차이의 결과만을 보여줄 뿐이며 물결의 파동이 갖는 실체적 은유가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 무엇보다 삶은 획정되지 않으며 국가, 그것이 하나의 타자로서 삶을 매개하고 수행하는 방식으로 다가올 수 있음까지 생각하게 한다.

죽음으로써 이루는 자연의 전유


 Ronaldo Ruiz는 새장을 얼굴에 씌우고 천천히 움직여 사다리에 올라가서 새장을 건다. 맹꽁이 소리 나며 자연을 전유하는 새의 상징물을 그 안에 걸고, 휘어진 나뭇가지에 깃발을 끼워 나뭇가지 끄트머리를 잡고 사다리에 올라가 흔들어 자연의 환경을 구축한다. 비닐을 깔고 나뭇가지 묶음을 비닐 안에 넣고, 테이프로 묶고 줄에 묶어둔다. 사람들을 향해 토마토를 던지는데, 기실 인간의 환경, 곧 나무를 뒤덮은 도시의 인공적 환경에, 서교예술실험센터를 벗어나는 빌딩건물에 던지는 것과 같다.
 호스를 입에 물고 목에 칭칭 감아 커피 잔 풀장에 들어간다. 물을 틀어 자신의 입에서 물이 새어나오게 하고, 머리를 담갔다 한참 있다 뺀다. 자신의 목을 졸라 죽음의 알레고리를 자연과 연결시키며 문명을 해체한다.

성매매가 성립하는 방식
 


 강성국은 검은 망사스타킹에 연둣빛 가발을 쓰고 다리 꼬고 브래지어 보여줄 듯 말 듯 자신의 가격 표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싸다고 한다. 창녀를 전유하는 작가는 담배를 피우고, 입에 문 채 온 몸을 뻗쳐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등장하여 상의를 벗고 관객 모두에게 성을 제공하려는 의사를 기꺼이 내비친다. 머뭇거림의 행동, 더딘 움직임, 천천히 감에 시간의 층차를 혼란스레 가져가며 사유할 생각들을 부여한다. 김백기 감독의 손을 잡고 가슴께 손을 넣어서 만지도록 하며 성적 코드의 소비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그것에서 방관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실재적인 전유의 과정으로 보여준다. 창녀는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관객 앞으로 현현되는 것에 가깝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4:03 Anth-e-nada(작품 포커스)


 고명숙의 기타에 맞춰 구성지게 흘러나오는, 정답게 고향 전원의 느낌으로 보듬고 어루만지는 목소리, ‘얄리얄리 얄랑셩’ 구성지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의 강물 같은 리듬.
 모든 것은 무상하게 흐르고, 집착도 허영도 미련 없이 지우고 버리는 삶의 철학을 제시한다. 그 기가 꽤 세다. 잔잔하게 한 곡조 연주 젖어드는데, 여기에 이봉교의 장구가 가세한다. 거칠게 공간에 퍼지고, 사람들은 막 춤을 추며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간다.


 김광석의 기타를 치는 손목과 팔의 힘이 많이 들어가 단단하게 기타와 연결된다. ‘챙’ 어떤 소리 격렬하게 휘몰아 닥치는 사운드 자체가 파열하며 트랜스하는 사운드가 부족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기타의 존재를 천둥 같은 에너지가 잠재하는 것으로 새롭게 치환시킨다. 하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악기로 다루며 거의 어떤 곡임을 상정하지도 않고 자유롭게 연주한다. 기타의 쿵쾅거리며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한다.


 장구 치는 이봉교는 축문을 외듯 지명들을 담아 글과 같이 선형적이지 않고 고유명사들이 섞인 본래적 의미의 기표들을 크게 의식 않고 뱉어낸다. 만약 외국인들이 그 단어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것은 전체적인 웅얼거림 같은, 뱅글뱅글 돌아가는 리듬 속에 있어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말 그대로 기표의 유희라고 말하며 대답을 회피하는 게 나을 것이다.


 사토 유키에의 힘 있는 목소리는 울림이 좋고 점점 무대는 무르익어감이 느껴진다. 에너지는 온 무대를 파고들고, 각기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세 곡을 부르고 나서 세레모니까지 ‘감사합니다.’ 길게 끌며 관객의 반응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이 에너지까지 자유롭게 연주한다고나 할까. 그는 무대장악력이 뛰어나다.

죄와 구원 사이에서


 Erik Hokanson은 한 명씩 관객을 끌고 와 ‘pride’ 등 일곱 가지 죄를 새긴다. 순서가 정해지거나 관객 한 명 한 명이 연결되어 이야기를 만들기보다 단지 일곱을 채운다는 의미에 가깝다. 줄로 관객을 묶고 담배를 물려준다. 신체 일부, 특히 배에 죄를 뜻하는 글자들을 새기는데, 원피스 등의 옷을 입어 피치 못할 때 다른 부위에 새긴다. 이는 절대적인 낙인과 같은 육화의 일부다. 동시에 다른 관객 한 명이 퍼포머로, 무대 바깥에서 돌아다니며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술을 먹여주고 레몬을 빨아먹는 모종의 미션이 실천되고 있는 듯 보인다.
 퍼포먼스는 묶인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음악을 즐기는 퇴폐적인 분위기에서 형벌의 무게는 증발되며 분산되는 시선과 조각나는 시간들 속에 치러지는 제의식 같은 것에 가깝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배에 ‘god’, 신이라고 쓴다. 그리고 호령하듯 자신의 배를 가리키고 분위기를 장악한다. 이로써 신의 권위와 지위를 갖고 성과 속을 이야기한다. 죄와 선물. 죄로 인한 벌과 줄을 풀어줌으로써 얻는 구원으로서 선물, 남자와 여자, 구속과 유희 등 평소 그가 상정하는 무대로서 구역을 신체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더 너른 벌판으로서 클럽은 그렇게 한 쪽에서는 춤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는 일군의 구속된 사람들과 그것을 보며 음악에 몸을 흔들어 대는 일군의 사람들이 대립적인 구도를 이루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3:56 Anth-e-nada(작품 포커스)


 처음 간략한 소개 멘트와 같이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소셜 네트워크 툴이나 온라인 툴들로 서로의 예술을 표현’하고 네트워크하는 시점에서 네이트온이나 스카이프 등을 중계 매체로 활용하여 펼쳐지는 릴레이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배우이자 무용수인 아티스트 전수진은 무표정한 얼굴에 위태하게 서서 천천히 유동하며 움직였다. 유동하는 신체의 언캐니에 이르지는 않지만, 신비스러운 층위에서 의식은 심연에 있되 구불구불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오며 외파되는 모습을 보였다.


 즉흥성을 살려 충주 건국대에서 학생 두 명은 앞의 공연을 레코딩해서 다시 영상으로 만들어서 상영하는 미션을 계획하고 있었고, 일단 실시간 퍼포먼스로 ‘깐풍기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네’의 비트 강하고 가사가 인상적인 랩과 노래를 펼침을 영상으로 중계하는데, 중간에 화면이 끊기기도 하는 단속적 출현, 모자이크식 색감으로 독특한 영상의 결이 만들어진다.


 John Bonafede의 「For Those Who Were Silenced Before Me」 역시 아프리카 방송으로 송출되는 라이브 퍼포먼스로 펼쳐졌다. 좁은 감방을 상정하고, 수갑을 채운 죄수를 심문하며 욕조 속에 머리를 담갔다 뺐다 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동시에 죄수에게 난센스 질문을 던져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케 만드는 아이러니를 다룬다. 물에 얼굴이 잠기는 죄수 Bonafede에게 가해지는 심문 행위 동안에 또 다른 죄수의 피아노가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고, 결과적으로 Bonafede가 실신하게 되는, 몸을 통해 나타나는 수행적 지점을 극명하고도 극적으로 다루며 정치적인 풍자를 적나라하게 관철시킨다. 
 

 흰색 옷을 입은 성백 작가는 부산에서 자신의 행위를 중계하는데, 의자 하나를 옆에 두고, 흙을 얼굴에 파묻고, 흙을 입에 머금고 흰 의자에 가서 뱉는 행위를 반복한다. 흰 꽃을 들고 와서 흙에 심고, 꽃을 손으로 가리킨다. 물을 머금고 돌아와서 뱉어 식물에게 물을 선사한다. 이는 자연에 기꺼이 기의하는 과정이며 인간 중심의 평화가 아닌 희생의 무른 영토를 시간의 궤적으로 서서히 다듬는 수행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중계하는 화면의 입자는 유동적인 층위 행위를 획정 짓는 데 불안정한 수행 지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연속되지 않음이 불현듯 나타나는 화면의 멈춤 현상에서 의식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재현되지 않는 현재에 대한 실재의 귀환으로서 과거가 출현하고, 과거의 일부분으로서 내지는 현재의 공백으로서 단절된 현재는 실재를 좇고 매개하는 카메라와의 더욱 공고한 관계를 가져가게 된다. 그 부유하는 영상은 마치 그것을 기억의 한 자취에서 현현되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실재가 전하지 못하는 것을 실재를 재매개하는 카메라에 의해 수용하는 신체의 감각이 재편되는 현상이 인다.
 원활하게 잘 작동이 안 되는 편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상대편 쪽에서 이쪽의 관객들을 수반한 무대의 반응이 잘 매개가 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보를 취하고 수합하는 건 임시적인 퍼포먼스 방송국을 차린 이곳에서 가능하고, 정보는 상대적이고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취해지지만, 선택과 확장은 자유롭다.


 ‘탕타당’, 둔탁하게 철판 같은 것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종이를 크게 깔고, 거기에 Amadeo Peñalver는 페인팅 드로잉을 한다. 실제 매우 약동하는 움직임에 거칠게 물감을 흩뿌리며 흔적들이 어지러이 덧입혀지는 것이지만, 이는 단속적 영상의 송출로 인해 중간 중간 변화의 궤적을 입은 다른 이미지들 삽입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신체는 하나의 덩어리와 같이 색색의 물감과 궤를 이뤄 위치한다. 그는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하나의 끈을 등에 연결해서 유동하는 신체로 표면과의 부딪침을 온 몸의 신체에 전달되는 떨림에 의해 붓으로서, 확장된 신체의 궤적을 종이와의 접촉을 통한 신체드로잉으로 치환시키며 점차 고깃덩어리 신체로 변모되어 간다.
 바닥은 완전히 빨갛게 칠해지고, 확장된 신체는 지배할 수 없는 신체로써 붉게 바닥을 만들고, 계속 의식을 때리는 반복되는 음향의 압박 속에 실재와의 마찰은 몸에 기록되는 흔적으로, 바닥은 하나의 신체 표면으로, 신체는 그 속에 융해되는 것이다.


 한 명의 배우는 계속 누워 있다. 엎드려서 손을 위로 뻗치고 심호흡을 하며 의식의 작은 물꼬를 튼다. 사운드가 강하게 증기를 뿜으며 나오는 그 안에 파묻혀 생각들은 회오리치며  회상된다. 의자에 앉고 세 개의 화면이 영상을 덮는다. 세 명의 여성이 웹캠을 통해 얼굴을 비춘다. 빛이 나는 물건들로 화면을 채우거나 얼굴을 칠하고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다른 사물들을 비추고 웹캠에 얼굴을 들이미는 식으로 장난을 친다.
 무대의 여자는 지하철을 타듯 손을 흔들고 일상의 장면들을 연출하고 흙을 파고 덮는 시늉, 머리를 묶어 얼굴을 뒤덮는 마임적 행위로 에피소드들의 분절된 나열 이후 유리 접시들을 가져와서 펼쳐 놓고 물감을 뿌린다.

 미디어에 의한 중계 방식은 공연의 질적 판단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어떤 행동들을 연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다른 층위들을 접속하는 미디어의 트랜스한 측면을 자유롭게 구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창, 하나의 층위에서 왔다 갔다 하며 펼쳐지는 시선의 분산은 인지하는 속도에 대한 감각들을 구현하며 실제와 가상을 하나의 창이라는 가상의 층위로 실재를 매개하여 치환시킨다. 여러 레이어를 접속했다 풀었다 다시 접속을 불러오는 접속  의식의 끈은 연결되고 판단하며 구성하는 세계를 상정하고, 클릭이라는 수행은 실재로 영상을 통해 현현시키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posted by 아트신
2010. 8. 31. 12:23 Anth-e-nada(작품 포커스)

 

예술로써 정치를 이야기하다


 윤진섭 작가는 퍼포먼스에 활용될 오브제에 관한 자신의 일화를 먼저 소개한다. 전철을 타려고 하는데 노점상 아주머니의 오토바이 장난감 파는 얘기가 재미있어 우선 사고 난 뒤 생각해 보니 노점상 사람들의 사회 경제가 만드는 삶에 쫓기는 현실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예술은 정치를 파괴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한다.
 휴게소 소음이 뒤섞인 음질 나쁜 노래들처럼 조악한 노래를 분출하며 돌아가는 레일 위를  달리는 인형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그 신체에 고정된 얼굴의 지각 항등성의 원리를 역전하며 인위적으로 갖추고 있고 다시 형성되는 표정, 그리고 끊임없이 레일을 도는 두 개의 인형의 운동 움직임은 묘하게 만나고 미끄러진다. 이러한 관계성의 미학에서 고정된 얼굴이 상대와의 관계를 상정하며 마주할 때 쫓아가다 다른 방향으로 가며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리듬의 출현과 틈은 인형을 존재로 상정하고, 두 존재를 하나의 무대 안에 놓는 무의식적 인지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작가는 임의적으로 만나게 할까 자문을 취하다 그건 퍼포먼스 규칙에 이배된다고 판단해서인지 중단한다.

설원에서의 축제


 Rubens는 개막식과 같이 상징적 표상의 흰 옷을 입고, 흰 래커를 군데군데 서로 교차로 뿌려 준다. 신체가 분절되는 지점 또는 튀어나온 부분인 무릎, 발, 성기께, 엉덩이, 가슴 등을 뭉쳐 덮는다. 후각적 심상으로 번지고, 하얀 시각적 전위와 축제처럼 간다. 한편 기름지고 층지게, 또 끈적거리며 달콤함 덩어리로서의 케이크의 심상을 가져간다. 흥겨운 노래가 나오고 그에 맞춰 신체를 흔들어 댄다.

이미지의 끝없는 환유 작용


 분홍색 줄로 테두리를 치고, 사다리를 세우고 붉은 풍선 묶음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풍선 하나씩을 사다리 다리에 하나씩 떼어 건다. 포르노 잡지들의 종이들을 찢어 무어라고 쓴지 확인하기 힘든 그만의 알 수 없는 문자 기호들을 적고, 성적인 소비의 대상물을 새롭게 전용하여 의식을 담되 그냥 날려버림으로써 이를 기억의 흐릿한 자취로 치환한다. 소비는 소멸로, 실체는 이미지에 대한 소비로, 소비는 기억으로, 기억은 소멸로, 소멸은 실체로 가는 기억과 소멸 사이에서 그것의 헛됨을 의식하게 한다.
 작가가 적은 바는 작가 말로는 일곱 가지 죄를 상징한다고 한다. 아울러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등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차원에서 죄 역시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의 분리적 의식에서 조금 더 가치를 넓은 층위에서 상정하고, 관계적 측면에서 둘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파티 신의 현전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물총 쏘며 유희로서 전쟁을 마구 감행하다가 즐거이 놀고, 커피 잔 안에 비키니 입은 남자들에게 상대방의 가면을 임의로 써서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치환하며 자유로워진다. 마지막 곡에서 사람들을 다 끌어들여 관객들 막 춤을 추고 흔들어 젖히면서 골반과 다리를 흔들어대며 몸을 음악에 맡기고 집단적인 신비 의식에 도취되며 보이는 것에 대한 자유로움의 의식을 신체의 기표를 증발시키는 방식으로써 의식의 무화와 보여주기로서의 자의식을 고취 시킨다.
 이는 기표의 발산과 증발만으로 이루어진 파티에서의 무화된 관계 맺음과 접촉의 극대화로서 자의식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가면이 갖는 평등하고도 일탈의 지위를 상정하며.

도시의 반대편에서...


 꽃 화분에 들은 사탕을 하나씩 나눠준다. 오브제이지만 신체 나눔으로 볼 수 있고, 커피 잔에 들어가 있는 꽃잎을 하나씩 뜯어 잔 안에 뿌린다.
 서교예술실험센터 옥상에서 시작된 퍼포먼스에서 Jill McDermid는 관객을 지하로 이끌고, 토치의 불꽃이 주는 명상성에 하얀 설원 공간이 흘러가는 영상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관객에게서 등져 앉아 그것을 전유한다. 누워서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는 희구의 자세를 품고, 도시에서 자기만의 내면의 공간에서 꽃잎들을 놓고 앉아 자연을 의식적으로 체화한다.
 이러한 행위가 어느 정도 유효한 전략으로 성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작가는 관객에 대한 의식을 거두어 다른 층위에 접근함으로써 다른 층위에 대해 가정케 한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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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0. 22:50 Anth-e-nada(작품 포커스)

 
어릴 적 순수한 기억으로서 전쟁

 갈개로 나무를 갈고, 샹송은 신나는 분위기를 이끈다. 여유롭게 마음껏 유희의 몸짓으로 갈개를 들고 날리며 유유자적 종이비행기처럼 띄운다. 비행기는 추락하거나 폭격의 증후를 내재하지 않고, 작가는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의 자잘한 움직임으로 노닌다.

 작가에게 있어 전쟁은 그 그릇된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전쟁의 긍정적인 의미의 전유와 회복을 가리킨다.
 즉, 작가에게 있어 전쟁이 하나의 상징적 기호라면 전쟁은 긍정․부정의 전쟁이란 두 개의 상징으로 치환되기보다 보통 인류적 동태의 중요한 부분을 장식하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전쟁의 상징 자체를 지우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작가는 언어의 미끄러짐 속에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부정적 의미의 전쟁이란 언어를 환치하고 전쟁이 임재하지 않는 본래적 삶으로 도약한다.
 그렇다면 전쟁의 인류사가 낳은 비극의 과거이자 실상은 역사의 잔여물이거나 긍정적 삶의 관계와 유희의 태도를 그릇되게 오인하거나 망각하는 것임을 작가는 은연중에 전제하는 것 아닐까.

귀여운 인형 같은 보컬, 전자사운드 가미한 밴드, ‘밀크티’


 인형과 같은 무화된 목소리로서, 전자사운드에 맞춰 춤을 춘다. 여느 밴드와는 다른 상큼한 느낌을 극대화해서 전자 사운드의 날카로움을 최대한 무디게 하고, 안무는 귀엽게 녹아들게 하고 손짓으로 온 몸의 에너지를 몸에 가냘프게 띄우는 식으로 귀여움으로 발산한다.
 약간 뇌쇄적인 매력이 비치는 ‘너에게로 향하는 나에게로 미치는’ 관계의 상정 아래 묘사하는 노래가 이어졌다.

 흥겹게 발을 구름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내파의 과정을 서서히 불러일으키며 층위의 전환은 한 지점을 향해 구멍을 만들고 다시 메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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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0. 22:45 Anth-e-nada(작품 포커스)


「아가씨」, 「피노키오」, 「Boy & Girl」(에이스매직_이제민), ‘동화 같은 극적인 이야기에 녹아들은 마술’


 가마 놓고 도령으로 분장한 마술사 이제민은 조선시대 정도의 역사적 배경을 안기는 극을 상정하며 전반적으로 마술을 극적인 내러티브를 갖춘 공연 양식에 접목한다. 천에서 꽃봉오리가 되는 간단한 마술로 보통의 장미꽃 마술을 치환함으로 시작해 전반적으로 ‘춘향전’의 스토리를 차용하여 무대를 만든다.
 신부와의 동화 같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이후 사또가 각시탈을 씌우고, 상자에 신부를 가두고 칼을 쑤셔 넣자 손을 들어 항복한다. 상자를 벗겨내자 사람이 바뀌어 있고 포졸이 가면을 벗자 여자가 나타난다.
 마술봉을 들고 걸으면 사운드 효과를 줘서 발을 맞추는데, 마술봉을 흔들 때마다 마술사는 경쾌한 소리를 자연 받는 데 반해 관객석에서 자원해 나온 한 아이가 흔들 때는 소리가 다르게 들려 웃음을 준다. 특정한 자세를 잡자 비로소 같은 소리가 나는, 특정한 눈속임이 아닌 매체와의 조응으로 마술을 만든다.
 이는 공연에서의 리얼리티를 관객으로 전이시키는 것으로, 소리 나는 것은 단지 맞추는 것이지만, 곧 음향 감독 등이 조정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무대에서는 리얼리티를 상정하기에 그것을 교묘하게 실재와 무대라는 것에 대한 인지 사이에서, 내지는 감각과 사유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춤을 립싱크하며 추고, 여자를 기타 앞에 위치시키고 안아 올려 허공에서 옆으로 누인 상태를 만든다.

「귀향」(강정균), ‘노스탤지어’로부터 출발한 본래적 삶의 회복



 고명숙의 반복된 노래는 고향의 구성지고도 구수한 느낌을 선사한다. 강정균의 마임은 그 노래에 맞춰 어머니가 올 때의 아련한 향수 같은 노스탤지어를 체현하고 자극한다. 마임의 표현력을 고스란히 살려 춤으로 녹여내 아기로 돌아가고, 손을 빠는 과거 몸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구체적인 행동의 배경은 실재로서 상정되기에 구체성과 함께 행동은 매우 현실성을 띠게 된다. 노래가 계속 반복됨에 따라 푹 침잠되는 분위기를 얻는다.


 어린 아이가 홍시 같은 미끄덩하면서도 달고 실한 과실을 베어 먹으며 몸피가 커짐 커지면서 어떤 도달해야 할 현실적 목표를 상정하고 고향에서 자꾸 멀어지고 또 성장하고 그 몸만큼 채워야 할 것들도 많아지지만, 한없이 달리기만 하는 세상에서 멀어진 노스탤지어는 역설적으로 현실을 떠나 다시 죽음의 태아적 기억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육화되며 고향의 안온한 기억도 되살아나 물 같은 휴식의 선물을 안겨주게 된다.
 여기에서 몸짓을 통한 표현으로 나타나는 물질/마음의 크기를 물리적으로 가늠하기 어렵거나 그 둘의 차이를 쉽게 양분할 수 없음에도, 어찌됐건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 하에 단단한 힘이 내재하고 그것을 의식이 상정하거나 내지는 몸짓의 확장과 수축으로 마음의 크기는 만들어진다.

「"GUT, Gooooooood!"」(이미희), 유려한 몸짓의 시간의 전유


 북 위에서 가녀린 동작으로 슬슬 펴 올리며 몸의 주름은 한복의 비단결 같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주름과 같이 순식간에 아릿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유유한 자취는 어떤 억누르는 정서 속에서도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를 보여주고, 북을 품에 안아 한의 덩어리로 전유하고, 신체의 확장으로서 의식을 부여하며 그것과 노닌다.
 북의 끈을 어깨에 걸머쥐고 길을 떠나되 아무도 곁에 없는, 홀로 저만치 가있는 뒷모습으로 아련하게 자취를 남긴다. 붙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 단지 시간의 흔적만을 더듬으며 좇아가지만 저만치 가고 그녀는 없다. 그 흔적이 가볍지만은 않다.

정경화, ‘판소리를 체험하는 시간’

 “잘한다!”, “좋지!”, 판소리를 함께 공유하고 전유하는 방식이 있음을 알리고, 그 추임새라는 것을 배워본다. 이로써 관객과의 한 바탕 판을 벌이며 노는 것이다. 노래 한 곡조를 뽑고 여기에 추임새가 더해진다. 판소리에 비트가 깔려 독특한 층위를 만든다.
 「춘향가」의 구성진 목소리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깊이를 메아리로 만들어 출렁거리는 진폭으로 접고 펴는 그 자신의 운동을 하며 울려 퍼져간다.
 멜로디를 지정하지 않고 발화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양상으로 점층적으로 덮여가며 하강을 기약치 않는 상승의 맥놀이로 끝 역시 지정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어야”를 유도하여 관객의 흥과 장단을 추임새 삼아 「뱃노래」를 불렀다.

김광석, 시간을 누비는 기타의 경지


 그의 손은 자유자재 막힘이 없고, 거칠 것도 없다. 시간을 마음대로 쓰고, 그에게서는 곧 시간을 물질로 늘리고 줄이며 그 깊이를 재는 게 가능하다. 기타의 퍼지는 소리는 마치 향처럼 다가온다.
 「섬집아기」를 치는데, 어렸을 적 들었을 때는 마냥 즐거웠는데 지금 연주하면 슬퍼진다고 이야기를 붙인다. 「바위고개」를 이어 했고, 기타로 민요를 연주함으로써 육화된 기억을 새롭게 체현케 했다. 「백도라지」 역시 다른 음계로 새롭게 전유해서 연주했다. 그가 오늘 연주한 곡들에는 소위 문화콘텐츠라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인위적으로 지정하는 표면적인 형식이나 전략적 지점에서의 선점이 아닌 우리나라의 문화적 누층이 순수하게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이들이 자라는 미래가 되어 있을 때는 경쟁률이 심하지 않을 테니 각자 꿈을 가지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World Improvisation'(Celinne Baque, Moeketsi Koema, 김봉호), 너울대는 에너지의 자장




 장구와 노이즈 사운드 무대를 누비고, 약동하는 에너지는 땅을 딛는 데도, 몸을 펼치는 데도 크게 자리한다. 벽에 기대서서 춤을 추되 몸을 털며 문화적 기억이 묻어나오게 하고, 에너지를 진동시켜 나오는 아프리카의 리듬에 한국적인 것들이 묻어난다.
 셀린이 돌며 내파하는 에너지를 물질처럼 뭉텅뭉텅 잘라내며 서서 거의 절정의 기량을 쉬이 뽐낸다. 약간의 위태로움도 암약하는 에너지에 닿아 있는 것처럼 셋이 모여 몸을 기대고 하나의 덩어리를 만든다. 에너지의 전이가 이뤄지는 얼굴은 진지하지만 꿈틀거림이 내재한 긴장으로 팽팽하다. 의식이 온 몸으로 뻗쳐 있는 가운데 얼굴은 단지 감각하는 거죽일 뿐이다.
 서로 기대 손을 모으고 걷기도 하고, 한 명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도 하며 몸의 지지대가 되어 주기도 한다. 몸을 꺾고 누비는 광활한 영토에 피가 흐른다.


 손을 위로 교차하며 그것에 끼어들고 서로 어지럽게 이지러지며 층위를 직조한다. 의식을 나누는 등에 기대 조용히 음악을 육화한다. 사운드가 하강하며 신체 역시 끝없이 침잠한다. 물구나무서서 에너지를 침잠하며 온 몸으로 확장 전이시켜 에너지를 담지한다. 앞을 보며 비로소 끝을 낸다. 



 즉흥에 의한 즉흥, 즉흥의 절정에서 탄생하는 즉흥의 마력, 모든 것을 분산시키는 기표들의 분출, 끊임없이 바뀌는 현존의 메커니즘, 달구어진 불덩이판, 웃음․땀범벅이 농후해지는 움직임, 문화적 누층으로서 기억, 춤의 실재성, 이 많은 것들이 뒤섞여들어 에너지가 넘실대는 판을 직조해 낸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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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0. 22:32 Anth-e-nada(작품 포커스)


Non Grata, 전쟁의 발생과 봉합의 과정의 전유 전략

 “예술은 전쟁이다!”, 확성기에 녹음된 관객의 목소리가 반복된다. Non Grata는 각국에서 온 아티스트 둘과 관객을 골라 그들의 몸에 개막식 때 이용한 상자 오브제를 씌우고, 'USA', 'GBR', 'AISA', 전쟁을 환유하는 사운드의 물총이 기본적인 도구로 동원된다.

 Tross는 표적 같은 것을 팔, 가슴 등에 붙여주는데, “Show start!"에 ‘물총 쏘기’ 전쟁이 펼쳐진다. 서교예술실험센터 옥상에 설치된 커다란 커피 잔에 설치 작품 안에 물이 채워진 상태에서, 그 안에서 경계구역을 상정하고 싸움이 맹렬히 유도되는 것이다. 순식간에 점화한 경기는 폭력성과 야만성, 나의 보호 구획 짓기에서 연유한 방어막으로서 국가라는 상징의 무력함, 폭력과 광기의 분출이 멈추자 소강상태를 맞고 휴전이 자연스레 형성되며 그 순간을 자연스레 이용하여 기념사진을 찍는 절차가 마련되었다.

 물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 공교롭게도 아시아 사람으로 상정된 관객은 상대적으로 몸이 많이 작아 실제 국제 정세에서 아시아가 갖는 정치적 영향력을 은유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옷이 찢어지며 국가라는 그 상징적 의미가 지워지고 감추어졌던 실체가 드러난다.
 다 같이 모여 사진을 찍고 역사적 휴전의 기록이 되고, 이는 신체로 발현되는 데 반해 몸의 기억은 부재하며 공허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는 것일까! 곧 문화적 기억이 지워진 상태에서 기억은 사라지고 단지 매체만 남는다. 현대의 매체로서의 기억의 전이와 복제는 삶의 부재하는 방식으로만 현실이 기록됨을 의미한다.
 역사와 매체, 이후 남은 건 봉합의 과정으로, 평화로의 한 순간에 기실 그 신체에 내재하는 삶의 육화된 기억들이 나타나게 될까?

이제민, 가벼운 마술의 전초전

 카드 마술을 가볍게 먼저 선보인다. 한 명의 관객을 동참시킨 후 카드를 고르게 한 후에 입에서 카드들을 물고 카드 사이를 벌리고 그 관객에게 보여주는데 계속 맞추지 못한다. 나중에 토해낸 한 장이 맞는 카드로 밝혀진다. 또 숫자 생각하게 하고 맞춤 판 내리면 썼던 숫자가 나타나는 마술, 카드 날리고 칼로 찍어 선택된 관객이 가리킨 것을 꼽자 관객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김광석, 기타의 무애의 경지

 기타에서 춤을 추듯 손이 노닌다. 자연스레 숨을 고르고 감흥을 가늠한다. 그 옷이 맞는지 입어보고 벗고 다른 옷을 입는 것처럼 재빠르게 그의 문체는 변화한다.
 리듬은 곡의 선정의 하나의 구조를 자연스레 파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굉장히 기타는 조용한데 춤을 추기 위한 전초전 성격으로 깔아주는 경향이 강하다.

박일화, ‘선녀춤’과 삶의 휴식의 집단적 체험

 손을 뻗으며 가는 그녀에게서 일종의 명상적 의식을 체현하는 상태로 나아감이 느껴진다. 선녀가 목욕하듯 옷에 물을 묻히고, 장구 소리가 거세지며 가까이서 들으면 귀청을 꽝 때리며 자극하는 소리를 낸다. 옷을 유유히 벗어젖히며 한쪽에 가서 제를 올리고 기복적 믿음으로서, 관객들에게 연꽃 만지는 행위를 하도록 한다.
 이후 커피 잔으로 들어간 그녀의 움직임은 선녀의 목욕이 현현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연꽃의 나눔은 가상으로 가기 전 그 층위를 단단하게 매어두는 것에 가깝다.

 음악에 맡겨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모든 짐을 내려놓고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아라리요 아라리 노래 소리 들려오네 나도 좋고 님도 좋고’하는 고구려밴드의 「아우라지 뱃사공」을 틀고, 그 안에서 자연스레 움직임을 만든다. 치유 기능으로서, 춤을 춘다기보다 즉흥으로 신체를 이완하고 몸을 흩뿌리고, 서울이라는 도시의 기억이 묻어 있지 않은 시공간을 상정한다. 그녀의 시끄럽거나 뛰노는 음악 안에서 명상을 취하는 것이 놀랍게 느껴진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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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0. 22:22 Anth-e-nada(작품 포커스)


 디제잉은 가속도를 밟고, 장구의 리듬으로 매개된다. 한편 기타 노이즈 사운드는 춤을 춘다. 음악적 멜로디와 리듬을 내재한 판에 기타의 실재 매질이 끼어들며 파고드는 것이다. 둘은 섞여 들어가고, 실재의 순간을 지정하며 시간성을 드러낸다.

 광란의 흔들어대는 춤, 오래 전 곡들로, 익숙한 코드들의 약간의 변용에 가까운 곡들로 리믹스된다. 외국 작가들의 유희적 놀이가 춤판에 어울리며 열띤 분위기를 이어갔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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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0. 22:12 Anth-e-nada(작품 포커스)


Edwige Mandrou, 국가의 육화


 철사가 이어져 바람에 유동적으로 부유하듯 날리며 움직이는 풍선 꽃으로 단 풀장에 한 편에 마련된 칵테일 바, 여기에 화려한 의상을 입은 쇼걸은 경제 순위에 따라 크기를 배분해서 자른 잘려진 하나의 빵에 여러 개의 국기들을 꼽고,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빵을 선택해 먹도록 한다.
 하나의 작은 빵에 꽂힌 여러 국기는 가난한 나라를 상징하고, 각국의 경제 순위를 고려하며 빵을 선택하게 되는데, 사실상 국기들이 촘촘하게 간격의 차이를 크게 보이지 않게 박혀 있어 빵의 크기를 가늠키 힘들게 되어 있어 보이는 것 가운데 임의적인 선택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Mandrou는 나눔의 의식 이전에 상징화된 기호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것의 해체화 전략을 실천한다. 국기들은 국가들을 상정하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생소한 것의 차이는, 온전히 국가를 기호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이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무용의 이미지로 남게 된다. 작가는 상징을 육화하는 행위로서 잔에 들어가서 호스를 불어제친다. 곧 빵이 단순히 빵이 아니라 국가이고, 그것의 살을 먹는 것이기에 환유의 상징적 기능은 실재의 부대낌으로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

 이 국기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작가의 말은 수용자의 몫으로 순전히 증여하는 실천적인 과제를 안기기보다는 잠재태로서, 의식의 지점을 추후 남기는 것에 가깝다. 물로 들어가는 건 그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예술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또한 관련 없는 것으로서 장소 특정적인 수행이 이전 콘셉트와 병치되며 지적 사유를 는 결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Kinki Iori, 죽음의 귀환과 삶의 자리

 ‘삐’ 소리가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거울 보면서 머리를 넘기며 의식을 무화시킨다. 시간은 정지되어 있고, 숨 막히는 정적에 있어 숨 쉬는 ‘나’를 자각하게 한다. 꽃을 향해 갔다 옷을 벗고 천천히 노닌다. 몸의 결을 따라가되 구불구불 몸의 궤적을 만듦은 생각의 유영을 뜻한다. 곧 의식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온 몸으로 이식되고 분배되어 움직임을 의미한다. 몸의 중심은 흔들리는 것으로 보이나 팔다리의 구분은 없고 몸의 경사는 위태롭지 않다.
 보이스 사운드가 나오면서 체를 비우고 용을 무용으로 한다. 허공을 응시하다 역시 커피 잔 설치 작품 속 물로 빠져들며 죽음의 늪에서 죽어도 죽지 않음, 곧 삶을 잉태하는 망각된 삶의 자리로 들어간다.
 전체적으로 목적 없는 행위, 의지 없는 의식, 무의식을 매개하는 몸을 완성함의 여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글/사진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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